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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명수 (서울신학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51호
발행연도
2019.9
수록면
187 - 235 (4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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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만들어진 신한청년당은 1919년 한국의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신한청년당을 신규식이 만든 동제사와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신한청년당과 동제사의 직접적인 관계는 많지 않다. 오히려 신한청년당의 구성원이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상해의 기독교공동체와 그 성격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본 논문은 신한청년당의 초기 형성과정에서 기독교가 미친 역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상해에는 오랫동안 YMCA가 존재했고, YMCA는 이곳에 오는 한국인들에게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것은 상해선인교회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당시 YMCA는 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난민을 돕는 사역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독립운동을 피해서 이곳으로 오는 한국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역은 이곳에 있는 일본 총영사관의 항의를 받았고,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상해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던 조지 필드 피치 선교사는 상해선인교회를 도왔다. 피치는 한국 장로교의 언더우드나 마펫과 관계를 갖고, 한국에서 오는 이들을 위해서 일했다. 그의 아들 애쉬모아피치도 이곳의 YMCA에서 일하며 한국인들을 도왔다. 상해 인근에 있는 남경에는 금릉대학에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대학으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이곳에 와서 공부하고 있었다. 이들은 영어를 배우면서 국제정세를 배우고, 근대적인 민주교육을 받았다.
상해선인교회의 청년들은 1918년 8월부터 독서모임을 만들어서 국제정세를 배우며, 조선의 독립을 꿈꾸었다. 이들은 여운형·선우혁·장덕수·김철·한진교·조동호 등이었다. 이들 중 여운형·선우혁·장덕수는 상해선인교회에서 전도인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한진교는 교회 회계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1918년 11월 말경 상해에 온 윌슨의 특사 크레인의 연설을 들으면서 이 기회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행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의 단체를 신한청년당이라고 명명하고, 파리 강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했다.
신한청년당이 보낸 청원서의 내용을 보면 이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첫째,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로 인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며, 둘째, 일본은 새로운 국제질서에 맞지 않는 비민주국가이며, 셋째, 한국은 독립과 더불어서 민주주의적인 국가를 건설하기 원하며, 넷째, 한국의 기독교가 국교와 같은 위치에 있고, 기독교가 한국에 민주주의를 가져온 단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한청년당은 한국에 기독교적 민주주의국가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임시정부의 헌장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중국 근대사에서의 상해의 위치와 한일병합 후의 한국독립운동
Ⅲ. 상해 한인 기독교공동체의 형성과 신한청년당의 출발
Ⅳ. 윌슨에게 보내는 청원서의 작성과정과 내용분석
Ⅴ. 맺음말
참고문헌
한글초록
Abstract

참고문헌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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