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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기운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원불교사상과종교문화 원불교사상과종교문화 제81집
발행연도
2019.9
수록면
215 - 250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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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수륙재는 개인의 추천(追薦)을 기원하는 개인적인 수륙재와 국가주도의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가 설행되었다. 이중에서도 국행수륙재는 국가가 주도하여 설행하므로 주로 왕실의 변란이나 나라의 전란으로 인한 생사와 관계있는 자들을 천도(薦度)하거나, 백성들의 질병 및 각종 자연재해를 구제하기 위한 의례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초기에는 국행수륙재가 개인적인 수륙재보다 많이 거행되었고, 후기에는 수륙재 자체도 대부분 줄어서 사찰중심의 개인적인 수륙재로 바뀌고 있다. 국행수륙재는 국가가 시행하기 때문에 왕이나 왕으로부터 위임받은 관리들이 실제로 담당하였다. 이때 정해진 소의경전은 없지만 다라니를 포함한 밀교경전에 의하여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지어 사용하였다. 수륙재에는 이들 수륙의문에 들어 있는 진언과 다양한 작법(作法)으로 구성되어, 가지(加持)에 의해 재난으로부터 구제하도록 했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 국행수륙재는 그 형식과 내용에서 밀교의례와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 초 밀교는 고려대와 같은 일상적인 도량(道場)이나 소재(消災) 등의 의식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국행수륙재와 같은 대중적인 성격을 띤 불교행사는 오히려 성행하면서, 소재 도량 같은 밀교 신행들이 적지 않게 설행되었다. 조선을 창업한 태조는 불교에 대한 깊은 신불심으로 현교(顯敎) 뿐만 아니라, 밀교(密敎)의 여러 가지 신행을 설행하였다. 수륙재 외에도 공작재(孔雀齋)와 각종 소재도량(消災道場)과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 사천왕도량(四天王道場) 제석도량(帝釋道場) 등의 밀교도량 및 밀교 사찰에 대한 불사가 행해져서 조선초기 밀교신행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국행수륙재는 억불의 시대 조선에서 대부분의 법회와 도량이 폐지되거나 위축된 가운데, 이것만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률로 제정되어 국가의 지원을 받고 국가주도로 설행되어 전승된 불교의례이다. 수륙재는 개인 신행으로부터 공공목적의 신행에 이르는 폭넓은 포용성을 지니고 있어서, 조선 초기 불교신행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목차

요약문
Ⅰ. 머리말
Ⅱ. 조선초 설행된 국행 수륙재
Ⅲ. 국행수륙재를 통해본 밀교사상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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