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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한문학회 한국한문학연구 한국한문학연구 제74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249 - 274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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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1501~1570)이 살던 시대는 성리학적 사상에 기반을 둔 사림파가 초석을 다지고 있던 시기였다. 그들은 우주와 인생의 본질을 탐구하고 부단한 窮理와 修身을 통해 聖人․化民이라는 至治를 구현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문학도 역시 道와 별개의 것으로 파악될 수 없었다. 그들은 문학이 도를 구현하는데 기여하는 載道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文以載道’의 원칙 아래 詩作이 전개되었고 詩作은 道學硏磨의 과정에서 수양의 방편으로 생각했다. 이처럼 시가 道를 닦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되었음에도 다른 도학자들에 비해 퇴계는 많은 수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우선 퇴계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연구 범위를 넓혀 시화집에 실린 퇴계 시화를 찾아 정리하고 비평 양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16세기 초 權應仁(1517~?)의 『松溪漫錄』을 필두로 19세기 중반 작자 미상인 『東國詩話』, 『東詩奇談』 등에 이르기까지 꾸준하게 시화집 작가들에게 주목받고 있었다. 퇴계 시화에 대한 시화집 수록 분량만으로 보면 적지 않지만 실제로 퇴계 시에 대한 평가는 소략했다. 그리고 17세기 이후부터는 인용된 퇴계 시화들이 대부분 계속해서 재인용되었고, 또 별도의 평가 없이 재인용되고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퇴계의 위상으로 인한 영남 남인들의 한계성 때문에 퇴계 시를 작품성으로 평가하지 못하고 인물의 위상을 고려해서 의도적으로 수록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 짓기에 몰두했던 전문 작가들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음이 짐작된다. 주지하듯이 철저히 주자를 계승하려 했던 퇴계의 정신이 그의 詩作에도 자연스럽게 구현되고 있는데 그러한 문학관이 시의 비평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것은 주자학이 전래된 이후 퇴계에 와서 비로소 주자학에 입각한 문학관이 온전히 구현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평가들은 과거 두보, 이백, 도연명, 소식 등을 詩作의 전범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성 수양에서 깨달은 경지를 읊은 시에 주목하였다. 퇴계가 자신의 시를 ‘沽淡’하다고 평가했듯이 비평가들은 주자학 도입 이래 도학적 문학관 곧 주자학적 문학관을 완전히 작품에 구현한 퇴계 시에 경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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