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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민족문화연구 민족문화연구 제84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291 - 334 (4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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嘐嘐齋 金用謙(1702-1789)은 그리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의 문제적 지식인들은 그와 막역하게 교유하였고, 그와의 관계를 특별하게 기억하고기록으로 남겼다. 이 글은 18세기 후반의 청년들이 왜 김용겸의 주변에 모여 들었는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여 그의 삶과 교유관계를 추적하였다. 김용겸은 장동김문이라는 노론 세가에서 출생하여 누대에 걸쳐 만들어진 노론 낙론계의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런 배경을 둔 김용겸은 정통적인 도학자, 예학자의 면모를 갖춘 노론 낙론계 학자였다. 그러나 김용겸은 당시의 학풍을‘假道學’이라고 규정하고 古禮에 천착하면서 博學을 통해 ‘眞道學’을 추구하였다. 박학은도학을 위한 학문적 방법론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도학보다는 박학이라는 방법론이 그의 학문적 위상을 대변하게 되었다. 김용겸이 청년들의 이목을 끈 것도 이 지점이다. 그는 기성의 학계에 피로감을 느낀청년들과 문제 인식을 공유하고 長幼와 貴賤을 가리지 않는 개방적인 태도로 젊은이들과 학문적으로 교유하였다. 이를 통해 청년들과 김용겸의 교유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김용겸과 청년들의 교유에는 전승해야 할 학문적인 의제도 없었고, 그 관계를 사제관계로 규정하지도 않았다. 나아가 김용겸이 그 중심에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관심사에 따라 어울리며 서로를 통해 지식과 정보를 얻고 스스로의 인식을 확장해 갔을 뿐이다. 박학을 매개로 하는 이 같은 학문적 네트워크의 존재를 18세기 후반 한양지식인계의 주요한 속성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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