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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74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65 - 94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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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릉비」에 나타난 서쪽의 ‘백무’와 북쪽의 ‘황룡가주몽’은 신라 중대의 사방 관념을 드러내는 용어들로 신라의 백제와 고구려 정벌을 상징하였다. 특히 북방의 ‘황룡가주몽’은 능비 후면의 ‘환산’과 연결되어 고구려 시조 주몽의 신화적 죽음을 통해 고구려의 멸망을, 그리고 신라 문무왕의 고구려 정벌을 상징하였다. 또한 북으로는 고구려의 옛 땅에 인접하였다는 신라의 북쪽 경계를 나타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신라왕의 비문에 기록된 주몽과 환산은 비슷한 시기에 고구려 유민 「천남생묘지명」에는 중모와 환산으로 기록되었다. 당과 신라라는 다른 공간의 두 비문이 고구려 멸망에 대한 원인과 상징을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이처럼 당에 망명한 고구려인과 신라왕의 비문에 동일한 용어들이 나온 배경은 신라로 망명한 고구려왕(보덕국) 안승의 존재로 파악해 볼 수 있다. 남생과 안승은 모두 고구려의 지배층으로 그들이 공유한 고구려의 역사와 상징은 그대로 당의 「천남생묘지명」과 신라의 「문무왕릉비」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7세기 신라 중대의 「문무왕릉비」과 「김인문비」의 출계 인식은 소호금천씨-투후 김일제-태조성한왕-태종대왕으로 이어진 형태였다. 9세기 신라 하대의 재당 신라계 인물인 김씨부인 묘지명의 출계는 소호금천씨-투정후(김일제)-요동으로 인식되었고, 이때의 요동은 두 가지를 내포하였다. 첫째는 신라 김씨의 출자관으로서 태조성한왕-태종대왕으로 이어지는 신라 중대 왕실의 출계 인식을 포함하고 있다. 둘째는 고구려의 옛 영토라는 관념으로의 영역을 의미하였다. 즉 요동=신라로 파악하였는데, 이것은 「문무왕릉비」의 ‘북접읍루’를 통해 고구려 옛 영역에 대한 신라의 관념적 영유를 7세기 신라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요동을 신라와 동일하게 보는 관념은 신라 중대에 형성되었으며, 9세기에 이르러 요동은 신라를 가리키는 용어로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 또한 「문무왕릉비」에 일통을 상징하는 “직구합일광 동정서벌”이 기록되었는데 이는 고구려를 상징하는 안승 세력이 신라에 포섭되었기에 가능하였다. 이를 통해 신라의 일통이 완성되었다는 상징성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684년 보덕국이 해체된 이후 신라는 고구려 세력을 완전히 흡수하였는데, 이것이 9세기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신라와 동일시되는 요동이 등장하게 된 이유로 보인다. 이처럼 문무왕의 업적에 해당하는 서방과 북방에 관념적인 용어들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나당전쟁 이후 경색된 당과의 관계 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나온 조치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문무왕릉비」의 사방관은 백제‧고구려의 위상이 모두 신라로 이어짐을 의미하며, 이 사방 관념은 문무왕대의 일통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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