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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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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26권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99 - 134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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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나당연합의 조건은 ‘평양 이남의 백제 토지’를 신라가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이 약속을 어기며 나당전쟁이 발발하였다. 나당전쟁 이후 당의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퇴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서북쪽 경계는 임진강 일대였다. 신라는 당과의 냉각기에 당의 예제를 수용하는 문화적 접근을 통해 당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주가 김인문의 영구를 신라에 전달하고 신라가 周曆을 채택한 뒤인 694년 겨울에 신라는 임진강을 넘어 송악․우잠 2성을 축성하였다. 또한 당 현종이 713년 10월에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 성덕왕을 새로 책봉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신라는 12월에 임진강을 넘어 예성강 인근의 개성을 쌓았다. 이처럼 신라의 서북방 진출은 대당관계의 개선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성덕왕은 40회나 당에 사신을 파견하는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취했다. 그 결과 당은 신라를 주변국과 달리 우대하였지만, 신라가 원하는 ‘평양 이남의 백제 토지’를 허락하지는 않았다. 신라는 발해와 당의 긴장관계를 이용하여 자신의 원하는 결과를 획득하였다. 8세기 초반 발해와 당의 긴장 관계 속에서, 신라는 당이 자신을 통해 발해를 견제할 의도가 있음을 알았다. 신라는 패강에 군대를 주둔함으로써 당의 의도에 부응하겠다고 당에 요청하였다. 그리고 당이 이를 허락하자, 신라는 패강 이남의 영유권 인정으로 확대 해석하였다. 결국 당도 이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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