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115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77 - 103 (27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당신전쟁이 발발한 이후 신라는 백제고지를 지속적으로 공격하였고 671년 6월 석성전투에서 당군을 격파하였다. 670년 말 당은 설인귀를 계림도행군총관에 임명하여 웅진도독부를 구원하였다. 설인귀가 신라 문무왕에게 보낸 「薛仁貴書」에 의하면 석성 전투에서 신라와 교전한 당군은 계림도행군이 아니라 백제고지에 주둔한 당군이었다. 신라군의 전략 목표는 계림도행군이 웅진도독부에 도착하기 이전에 백제의 당 병력을 소멸시켜 전쟁의 주도권을 얻으려 하였던 것이다. 계림도행군 편성을 전후한 당의 국제정세, 계림도행군의 규모, 그리고 당시 설인귀 자신의 개인적 상황을 종합해 볼 때, 당의 전략 목표는 웅진도독부를 구원하고 고구려 유민의 復國運動을 진압하는 것이고, 신라에 대한 공격은 징벌 혹은 응징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뿐 신라의 멸망까지 의도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당신전쟁 초기 계림도행군은 백제고지에서 신라군과 교전하고, 高侃의 東州道行軍과 李謹行의 燕山道行軍은 신라 이북지역에 있는 고구려 유민군을 격파한 뒤 웅진도독부에 있는 계림도행군과 함께 신라를 협공하였다. 하지만 석성전투 이후 당군은 이러한 계획을 실행할 수 없었다. 결국은 협공 계획을 포기하고 동주도행군과 연산도행군만이 신라 및 고구려 유민군과 전면 대결하여 672년 8월 石門 전투에서 신라・고구려 연합군을 대패시켰다. 그 결과 당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신라는 방어선을 구축함과 동시에 당으로 謝罪使를 파견하여 외교 수단으로 위기를 타개하고자 하였다. 그 사죄의 내용을 살펴보면 당의 전략 목표가 달성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라가 백제고지를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점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사죄사를 파견한 이후 당과 신라 사이에는 한 동안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사죄사가 사죄한 때문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마도 당이 한반도에서 유지할 수 있는 병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