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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포은학회 포은학연구 포은학연구 제24권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109 - 146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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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의 국왕과 정부에서는 포은의 유교적 상징성을 개국 초부터 파악하여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현창을 국가 차원에서 독점하려고 하였다. 조선 초기부터 포은을 추숭하고 묘소를 관리하며, 서원을 세우는 일련의 과정은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결과이다. 물론 그 가운데에 개성의 문인들이 주도적 혹은 협조자로서 활약하였지만, 자칫 개성의 역사적 의미가 강화되거나 조선 왕조 개국의 부당성이 드러나는 사안에 대해서는 국가적으로 차단하였다. 포은 이외에 그와 걸 맞는 고려시대 인물을 배향하지 못하게 하거나, 개성의 역사 유적에서 고려 왕조와 관련된 부분은 제외하고 포은에만 집중해서 그 사적을 정비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포은의 충절을 사표로 삼아 뒤를 이었던 개성의 문인들에게는 조선 왕조의 정치적 시민권을 정식적으로 포기하는 입장이었다. 개성이 한양 도성에 인접하고 있어서 지역 문인들이 과거를 거쳐 중앙 정치세력에 유입될 수 있는 기회를 지니고 있음에도 ‘절의(節義)’라는 유교적 명분에 입각하여 지역에 안주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말한다. 더욱이 조선 왕조의 지배층에서는 성종대까지 개성인의 과거 응시를 허락하지 않아 지역적 차별을 느끼게 하고 관로가 아닌 상업을 생업으로 삼도록 유도하였다. 개성의 문인에게 적극적인 중앙 집권 세력에 대한 부응이나 독자적인 자구책을 구활하거나 등의 선택이 강요되던 것을 말한다. 개성인의 과거 응시가 가능했다고는 하지만 중앙 정계의 고위직에 진출하는 것은 봉쇄되어 재야 지식인으로 생을 마치는 것이 많았다. 중종대 화담 서경덕이 정계 진출을 포기하고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구축하고자 한 것도 그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반면 개성 지역을 제외한 문인들에게는 개성의 포은 절개가 상징적으로 남겨진 유적들을 보고 선비 내지는 지식인이 받게 되는 정치적 한계를 체험하던 공간으로 여겼다. 조선 선비들이 개성을 방문하는 것이 유조의 ‘성소(聖所)’를 방문하는 것이었으며 그곳에서 지식인으로서 다짐하는 모습이야말로 포은이 남긴 역사적 유산이었다. 개성의 숭양서원, 선죽교, 만월대로 이어지는 여말선초의 긴박감과 역사적 결과, 조선 선비들의 ‘유조(儒祖)’라고 평가하던 포은의 죽음은 비분강개를 자아내는 기념비적 요소였다. 또한 개성이 한말에 이르러 자강을 이루고 지조를 지키려던 지식인들의 산실이 된 역사적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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