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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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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동양예술학회 동양예술 동양예술 제46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237 - 265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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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묵란화(墨蘭畵)가 어떠한 점에서 초(楚)나라 굴원(屈原, BC 353-BC 278?)의 「이소(離騷)」 영향을 받아서 원대(元代, 1271-1368)에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무근란(無根蘭)과 노근란(露根蘭)이라는 묵란화의 전범을 만들어서 시조로 알려진 정사초(鄭思肖, 1241-1318)를 중심으로 규명해 보는데 그 연구 목적이 있다. 난세(亂世)였던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굴원은 유능한 충신(忠臣)이었으나 모함을 받아 유배당하였는데, 자신의 결백(潔白)과 우국충정(憂國忠貞)을 국력이 쇠하여가는 초나라 왕에게 호소하고자 - 기존에 군자의 절개를 상징하던 - 난초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향초(香草)를 소재로 「이소」라는 장편서사시를 저술한 것이었다. 또한 정사초는 南宋(1127-1279)이 망한 후 은거하였는데, 망해버린 송나라에 대한 우국충정과 몽고족에 대한 항거, 즉 원나라에 국토를 빼앗겨 난초를 묻을 땅이 없다는 의미로서 흙과 뿌리를 그리지 않은 무근란과 뿌리를 드러낸 노근란이라는 묵란화의 전형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굴원과 정사초는 1600여년이라는 세월의 차이는 있으나, 극심한 난세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유배를 당하거나 은거하였다는 어려운 처지와 조국에 대한 변함없는 절개 의지가 유사하다. 특히 굴원의 시(詩)와 정사초의 그림에서 공통적인 소재인 난초가 ‘우국충정과 애국심’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바로 이러한 점으로 인해 정사초는 조국에 대한 절의(節義)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면 목숨을 위협 받는 식민 지배를 받는 유민이었으므로, 그 자신을 처지와 신념이 비슷한 굴원에 비유하여 「이소」에 담긴 난초의 상징 의미를 묵란화로 형상화함으로써 암시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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