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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제20권 제2호
발행연도
2021.9
수록면
1 - 35 (35page)
DOI
10.35161/rkapt.2021.0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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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三國史記』 「列傳」 金庾信 下 附錄 允中에 보이는 “宗室 ․ 戚里”를 중심으로, 新羅 聖德王 대(702~737)의 정치 질서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宗室 ․ 戚里”가 보이는 해당 사료의 시간적 배경은 712년 8월 무렵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愷元 ․ 金元泰 등의 인사를 구심점으로 형성되었던 세력으로, 중시 등 관료들의 인사를 통제하려 하였고 불교에 친화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들의 성격은 마찬가지로 “宗室 ․ 戚里”로 불릴 수 있는, 이후 宿衛 외교에서 보이는 ‘왕족’ 인사 ․ 金順元 등까지 계승되었다고 보았다.
이들과 대립한 비“宗室 ․ 戚里”계 인사들은 允中(允忠)으로 대표되며 유교적 관료제를 추구하면서 “親親”의 논리에 맞서 “善善”의 논리로 비호되었다. 이들은 712년 무렵부터 “宗室 ․ 戚里”계 인사와 대립하며 집단화되어 7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정권의 주류를 차지하였으며, ‘왕족’을 宿衛 외교에 동원해 국내 정치와 격리시키고 외척을 통제할 적지 않은 권한을 갖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이들의 권력이 일정 이상 강해지자, 후계자인 金承慶(孝成王)은 신충과 김순원 등 “宗室 ․ 戚里”계 인사와 접촉하며 이들을 해체시킨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볼 때, 성덕왕 대 정국 속에서 “宗室 ․ 戚里”의 성격을 재고해 보게 된다. 곧 그들은 그 성격상 오히려 국왕에 의존적이었으며, “宗室 ․ 戚里”라는 집단이 등장한 것 또한 방어적인 의미에서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효성왕 대에는 “宗室 ․ 戚里”와 비 “宗室 ․ 戚里”계 인사의 대결 구도 자체가 해체되었으며, “宗室 ․ 戚里”는 성덕왕 대의 정치 상황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한정된다고 여겨진다.

목차

국문요약
Ⅰ. 머리말
Ⅱ. 聖德王代 정국 속의 “宗室 ․ 戚里”
Ⅲ. 聖德王代 정치 질서의 추이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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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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