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송현강 (한남대학교)
저널정보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남도문화연구 남도문화연구 제42호
발행연도
2021.1
수록면
137 - 166 (30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6)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19세기 내한한 남장로교 여성 선교사들은 대체적으로 고학력자들이었다. 8명 중에6명이 대학을 졸업했는데, 1900년 당시 미국 인구 중 고졸자는 14%, 대졸자는 3%였다는 점, 그리고 1900년 미국의 대학 진학률(2~3년제 포함)이 남자 8%, 여자 6%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들이 어느 계층에 속해 있었는지 좀 더 분명해진다. 하지만 그들이 생활했던 피선교지 환경은 그렇게 우호적인 것이 아니었다. 8명 중2명이 선교 현장에서 사망했고, 1명은 남편과 사별했다. 모두 5명의 아이들이 목숨을잃었다. 또 기혼자들은 출산과 양육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팻시와 루시 그리고 샬럿은선교 현장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선교사 남편을 내조하는 일에 우선하였음을 본다. 그들이 보여준 근대적인 가정 경영 즉 자녀양육과 부부생활의 태도는 암암리에 주변의 한국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 그들은 여성과 어린이 사역 분야에 큰 성취를 거두었다. 남녀유별의 성리학적인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 전도는 거의 그들의 몫이었다. 한국인들의 가정 내부로 파고들어가 여성들을 교회로 이끌어 사회적 존재로 거듭나게 했다. 여성 사역은 지역교회성장의 견인차였다. 그리고 여선교사들은 학교 교육에 관심을 기울여 군산남학교와 여학교, 그리고 전주여학교, 목포여학교를 세웠다. 그 학교들은 처음에는 미약하였지만 금세 지역 여성들의 배움터로 우뚝 섰고, 그 후 지속되었다. 이렇게 19세기 내한 남장로교 여성 선교사들은 피선교지에서 가정 경영과 여성·아동 전도 그리고 학교 교육을 통해 한국 선교에 이바지 하는 한편 해당 분야의 초석이 되었다. 이 글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초기 남장로교 여성선교사들을 발굴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들에 대한 구조적 분석과 영향에 대한 연구는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