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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송현강 (한남대학교)
저널정보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남도문화연구 남도문화연구 제29호
발행연도
2015.12
수록면
159 - 181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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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장로교(PCUS) 선교사 클레멘트 오웬은 1867년 생으로 목사와 의사로서의자격을 동시에 갖춘 흔치 않은 이력의 선교사였다. 1898년 11월 목포에 도착한 오웬은그 때부터 바로 의료 사역에 착수하여 이듬해에는 불과 몇 달 동안 400여 명의 환자를진료하였다. 목포교회가 1900년 여름 75명의 회중으로 늘어나게 된 데에는 오웬의 의료사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웬은 1904년 광주로 이동하여 그 때부터 5년 간 전남 남부와 동남부의 지역 교회들을 돌보는데 진력하였다. 그는 마을의 사랑방에서 한국인들과 대화하는 것을 최고의가치로 여겼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당시 오웬의 담당 구역은 한 명의 선교사가 혼자담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넓었다. 선천적으로 체력이 약했던 그의 순회 사역은 그래서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묵묵히 자신의 책임을 다하였다. 특히1907년과 1908년은 오웬 사역의 절정기로 모든 영역에서 두 배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1909년 3월 오웬은 광주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장흥의 교회들을 순회하던 중 급성폐렴에 걸려 결국 순직하고 말았다. 그 후 부인 휘팅(Georgiana Whiting)은 1919 년까지 자녀 4명과 함께 광주에 머물며 선교사역을 이어갔다. 나중에 그의 구역을 방문한 동료 선교사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이 알고 있었던 것에비해 그곳의 성장세가 훨씬 빠르고 강력했기 때문이다. 즉 오웬은 자신이 담당했던 구역의 성공과 성취를 다른 선교사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겸손한 사람이었다. 오웬은 한국교회에 내린 벼락같은 축복이었다. 지금도 오웬이 설립한 교회들이전남의 곳곳을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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