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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귀한 (민족문화유산연구원)
저널정보
백산학회 백산학보 백산학보 제119호
발행연도
2021.1
수록면
107 - 132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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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산성은 15∼16세기의 상황을 알려주는 문헌이나 물질자료가 부족하다. 따라서 독산성에관한 기존의 연구는 사료가 풍부한 임진왜란 이후의 시기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연구 경향으로인해 조선시대 독산성의 성격 변화를 구조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글은 독산성에서출토된 백자를 통해 조선시대 독산성의 변천 과정을 당시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 유기적으로설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독산성에서 수습된 백자는 대부분 18∼19세기에 제작되었다. 17세기로 추정해 볼 수 있는유물도 확인되었다. 이에 비해 15∼16세기에 생산된 자기(磁器)는 소수에 불과하였다. 이와같은 백자의 출토현황은 17세기 이후 독산성의 성격이 변화된 사실을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15∼16세기 독산성은 수원부의 입보용(入保用) 산성(山城)이었다. 조선 초 산성은 전쟁 등비상시에만 활용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세종대 산성에서 읍성(邑城) 중심의 방어체제로전환되면서 ‘수원(水源)’을 확보하기 힘든 독산성이 정비될 가능성은 희박하였다. 독산성은임진왜란 당시에도 ‘고성(古城)’이라는 이미지(image)가 강하였다. 임진왜란 중 독산성은 수축(修築)되었으나 전쟁이 끝나자 다시 관리가 되지 않았다. 이는 비상시적인 입보성의 일반적인 한계였다. 17세기 이후 독산성은 비상시적인 입보성에서 상시적인 군사적 공간이자, 민들의 생활공간으로 변모하였다.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이 종결된 이후 양호(兩湖)의 도적이 증가하자 독산성에 도성을 보호하기 위한 치안(治安) 기능을 부여하였다. 성내에 우물을 만들고, 밭을 일구어식량을 확보하였다. 군사훈련도 실시하였다. 독산성은 백성과 군인 등이 항시 거주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독산성 내에 사람이 생활하게 되면서 백자의 수요가 발생하였을 것이다. 독산성에서 이 시기 백자가 집중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독산성의 성격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것으로 추정된다. 요컨대 독산성에서 출토된 백자는 독산성이 15∼16세기 비상시적인 입보성에서 17세기이후 상시적인 공간으로 변모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물질자료(物質資料)이다. 아울러 문헌을 통해 17세기 이후 독산성의 성격이 변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연구는 조선시대독산성의 변천 과정을 유물과 문헌을 바탕으로 역사고고학적인 시각에서 검토하였다는 데에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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