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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건우 (전주대학교)
저널정보
전북사학회 전북사학 전북사학 제60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245 - 274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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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순창 삼인대의 성역화 과정과 수호, 그 위기에 대응하는 지역 士族들의 방식에 대해 논구하였다. 1515년(중종 10) 三印臺에서 폐비 愼妃의 復位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린 지 200여 년이 지난 후 愼妃가 復位됨과 동시에 삼인대의 장소적 상징성이 공인받았다. 그 후 삼인대 참여 인물의 순창 화산서원 배향, 碑文 제작, 碑閣 설립 등 성역화 과정을 계속 확대해 나아갔다. 특히 正祖의 삼인대 관련 御製는 국왕의 권위에 힘입어 성역 수호의 특권을 지속적으로 부여받는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삼인대의 위기와 함께 이를 수호하기 위한 방식으로는 비각보수 지원, 비각 10里 이내 松楸 보호, 偸葬과 경작 금지, 山直과 碑直 탈역 등이다. 이를 위해 官에 각종 청원과 탄원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삼인대 일대의 禁護를 위해서는 지방관으로 대표되는 관아의 협조가 필수적이기에 실제 효력에 있어서 제한적인 상태였다. 삼인대 성역의 특권을 지속적으로 재확인하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후에도 성역의 침범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節目의 조항은 제대로 준수되지는 않았다. 또한 삼인대의 성역화 과정에는 金淨·朴祥·柳沃 三賢의 후손들이 주도적으로 노력을 쏟았다. 그 중 柳沃의 후손들의 활동이 주목되었는데 그들은 家格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로 삼인대 성역화를 적극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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