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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경화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미술사와 시각문화 미술사와 시각문화 제20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68 - 99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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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2년 70세의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자신의 인생을 기념하여 한 장의 자화상을 그렸다. 이 그림 속에서 그는 관모에 야복을 착용한 낯선 차림새로서 화면 밖을 응시하고 있다. 강세황이 지은 자찬문에 의하면 관모는 조정의 관료를 의미하며 야복은 산림의 지식인을 의미한다. 이런 상반된 의미를 지닌 의상을 조합함으로써 강세황이 그리고자 하였던 자신은 어떤 인물인가? 강세황의 70세 자화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삶을 돌아보면 뚜렷한 자기인식을 예술적으로 드러내는 순간들을 찾을 수 있다. 1766년 54년간의 인생을 정리한 「표옹자지(豹翁自誌)」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자서전에서 강세황은 대대로 고관을 배출한 소북계 명문세가의 후손이라는 자각과 선조에 대한 계승의식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형 강세윤(姜世胤, 1684-1741)이 1728년 무신란에 가담한 혐의를 받아 유배된 이후 그의 가문은 급격히 쇠락하였다. 가문의 복권이 지연되면서 장기적인 금고의 상태에 처한 강세황은 1744년 처가인 진주 유씨가 세거한 안산으로 이주하였다. 안산에서 강세황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출사를 포기한 은일자를 자처하였으며 동시에 가문의 복권을 위한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문인 사회의 회화 요구에 수응하며 시서화 삼절(三絶)로서 명성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763년 강세황의 집안이 정치적 복권을 이루는 순간 그는 그림을 단념해야만 하였다. 그의 절필은 화가로서의 명성으로 인해 그의 가문이 관료 사회에서 논란에 휘말릴 가능성을 염려했던 영조의 교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강세황은 문인으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해야만 하였다. 「표옹자지(豹翁自誌)」에서 강세황이 절필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며 자신을 전형적인 여기화가(餘技畵家)로 그려낸 것은 온전히 문인으로서의 이미지를 공식화하려는 시도였다. 1773년 마침내 영조의 소환을 받아 강세황의 출사가 성사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운명의 전환은 1776년 정조가 시행한 기구과(耆耈科)의 급제와 함께 찾아왔다. 정조는 강세황이 시문 외에도 서화의 능력을 겸비했음을 높게 평가했으며 그의 능력을 국정에 활용하고자 하였다. 서화의 효용성이 부각되었던 정조의 조정에서 강세황은 일련의 활동을 통해 관료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였다. 1781년 정조의 30세 어진 제작의 감동을 계기로 절필을 마친 그는 1782년의 〈70세 자화상〉을 그렸다. 〈70세 자화상〉에서 관모는 강세황이 그간에 조정에서 얻은 관료로서의 성취를 의미할 것이다. 반면에 야복의 의미는 한해 앞서 한종유(韓宗裕)가 제작한 선면 초상화를 통해 보다 분명히 도출할 수 있다. 어진 제작을 마치고 규장각에서 그린 이 초상화에서 그는 산수와 노송을 배경으로 손에는 책을 든 지식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강세황이 세상에 보이고자 하는 정체성의 일면이 바로 산림에 머무는 탈속한 지식인임을 의미할 것이다. 강세황은 국왕의 부름을 받아 관료가 되었지만 재야 시절은 사회적 인정의 근거이자 자기정체성을 규정하는 의미 있는 측면으로 남아있었다. 〈70세 자화상〉을 그리며 강세황은 고아한 정신세계를 의미하는 야복의 도상에 조정에서의 지위를 상징하는 관모를 더하였다. 아울러 화면의 여백에는 풍부한 지식과 예술적 재능에 대한 자부심을 담은 자찬문을 적었다. 서로 다른 정체성을 의미하는 도상과 내면세계를 묘사한 찬문은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정교한 고안으로 이해된다. 강세황이 〈70세 자화상〉을 그리며 담아내고자 하였던 자신이란 뛰어난 능력을 인정을 받아 조정으로 부름을 받은 재야의 지식인, 바로 ‘관모를 쓴 야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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