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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노용순 (영남대학교) 채광수 (영남대학교)
저널정보
동아인문학회 동아인문학 東亞人文學 第58輯
발행연도
2022.3
수록면
439 - 463 (25page)
DOI
10.52639/JEAH.2022.03.58.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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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후기 선산 안강노씨의 종중 특징과 18・19세기 족보 발간을 둘러싼 적서 갈등의 전말을 검토한 것이다.
14세기 후반 선산에 입향한 안강노문은 송당・서애・여헌학파와 學婚으로 연계되어 지역의 주요 사족일원으로 안착한다. 그러나 중흥조 노수함의 장자 노경준이 적자 없이 사망하자 義母 인동장씨는 ‘총부권’을 활용해 형망제급으로 3자 노경필을 봉사자로 지명했다. 안강노문은 장손계열이 아닌 차남계열에서 종통이 계승되었고, 18세 이후 처사공서자동령파・찰방공파・장사랑공파・교리공파 4개 파로 분파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시기 병마절도사에 오르는 노계정 이래 문한가에서 무반가로 전환이 되었다. 종중 내 위상이 남달랐던 노계정과 그 가계에 의해 종권과 종론이 주도해 나갔다. 흔히 조선시대 종권은 고정적이라고 인식되지만, 실제로는 각 가문의 환경에 따라 유기적으로 작동되었음을 알려준다.
조선후기 개별 종중은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차별화하기 위해 족보 편찬이 유행하며 그 중요성도 강조되었다. 노계정이 만든 《안강노씨초보》에는 ‘庶’를 명기해 적서의 엄격한 구별을 두었다. 그런데 종중 내 경제적으로 성장한 盧洙는 신분 상승을 위해 족보에 자신의 이름 위에 ‘庶’자를 삭제 의견을 제기하여 수용이 되었다. 그러나 의도와 달리 다른 서족들의 반발로 ‘庶’자 전체가 삭제된 족보가 출간되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서파가 적파의 소목으로 편입되는 奪宗으로 비화가 되었다. 즉 선산 안강노문의 대종손이 약 150년 만에 노세효에서 서자 노동령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이에 노상추는 32년이 지났음에도 소송을 통해 인동장씨가 수립한 종통을 재정립하고, 위보를 전량 소각하는데 성공을 하였다. 종중의 주도 계파인 노상추의 家勢가 종통 유지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시켜준 사건이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종중의 형성과 주도 系派
Ⅲ. 족보 발간을 둘러싼 적서 갈등
Ⅳ. 맺음말
參考文獻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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