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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송미숙 (한국교통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미술사교육학회 미술사학 美術史學 第44號
발행연도
2022.8
수록면
241 - 266 (26page)
DOI
10.14769/jkaahe.2022.08.44.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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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 제작된 이순신 초상화를 통시적으로 살펴보면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이순신 초상은 구군복 차림, 그리고 해방이후에는 갑옷이나 관복차림의 이순신 이미지로 구현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시대와 필요에 따라 이순신의 이미지는 변화와 변용을 거듭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순신 초상화는 대부분 영정 초상화였던 관계로 국가나 단체의 의뢰로 제작되었기에 이순신 초상화는 시대별 사회상을 반영한다.
일제강점기 이순신 이미지는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임진왜란에서 전승했던 이순신에 이입시키는 바람에 한층 더 강하게 신격화된 경향이 있었다. 특히 1931년 아산 현충사와 묘소 위토가 경매로 넘어가게 된 사건은 민족주의 감정을 폭발시켜 현충사와 한산도 제승당 중건과 함께 이순신 초상화가 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그려진 이순신의 모습들은 모두 구군복의 복장으로 다소 유화된 이미지를 보인다. 1930년대는 일본의 문화정치 전략으로 이순신 숭배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은 없었으나 위협적으로 보일 수 있는 갑옷차림의 전쟁하는 이순신에 대한 이미지 표현은 배제되어 있어 일본의 간섭에 대한 의문이 제기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이순신 초상화는 거의 대부분 대중들에게 자극적이지 않은 순화된 이미지 즉, 구군복을 입은 초상화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조직된 ‘충무공기념사업회’는 이순신을 활용해 애국민족주의 감정을 촉진시켰다. 정부인사가 포함된 ‘충무공기념사업회’는 처음에는 이순신을 반일의 표상으로 내세웠고, 한국전쟁 상황에서는 이순신을 반공의 아이콘으로 활용하려 했었던 정황이 드러나는데 급박한 전시 상황에서 장우성에게 현충사의 〈충무공상〉을 의뢰했던 점이 그러하다. 이처럼 1950년대에 이순신 초상화는 장우성, 김은호 등의 화가들에 의해 국가적 차원에서 제작되었고 화제를 남기며 각각의 이순신 사당에 봉안되었다. 1960년대에는 이순신 사업이 국가적 차원에서 대규모로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현충사는 국가기념시설로 전환되며 성역화 된다. 또한 1968년에는 세종로 대로변에 김세중의 〈충무공상〉이 세워졌고, 1973년에는 현충사에 봉안된 장우성의 〈충무공상〉을 표준영정으로 제정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다양한 이순신 사업이 유신체제에서 발생된 이유는 현시대를 이순신의 시대와 동일한 위기상황임을 강조하여, 국민들 역시 국가를 위해 과감히 멸사봉공할 수 있는 자세를 은연중에 주입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제정된 표준영정제도는 물론 산재했던 이순신 이미지를 통일하여 대중들의 혼란을 상쇄시켰다는 순기능도 있지만 그에 따른 다른 문제점도 드러난다. 표준영정의 ‘표준’의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전래되는 이순신 초상화가 한 점도 없었고 몇몇의 문헌에서도 구체적으로 파악되는 용모에 대한 기록이 미비한 데도 불구하고 기준점이 세워지지 않은 상황에서 표준영정이 지정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역사의 과오가 될 수 있다는 점을 환기해야 한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근대 소설에 표현된 이순신 이미지
Ⅲ. 이순신 초상 이미지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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