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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姜眞周 (한국교통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문화사학회 문화사학 文化史學 第57號
발행연도
2022.6
수록면
5 - 41 (37page)
DOI
10.29334/MHSH.2022.06.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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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용인 보정동 소실봉 일대의 고분 조사 현황과 출토유물의 양상을 살폈으며, 출토유물을 통해 시기 구분을 시도하였다. 특히, 신라 고분 뿐만이 아닌 백제와 고구려의 고분까지로 함께 살펴봄에 따라 소실봉에서 축조된 고분의 양상과 성격을 파악하였다.
먼저, 한성 백제기의 소실봉에는 북쪽 동사면에는 주거지가 조성되고 이후 남쪽 남사면에 고분을 축조하여 입지와 시기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구려 고분은 북쪽 동사면 말단에 위치하는데 전형적인 남한지역의 고구려 고분의 특징을 띠고 있다. 신라에 의해 조영된 고분은 출토 유물을 통해 3기로 구분하였는데, 1기에 해당되는 것은 북쪽의 동사면과 남쪽의 남사면에 위치하며 2기의 유적은 남쪽의 남동사면에 있다. 3기는 북쪽의 북사면과 남쪽의 남동사면 말단에 위치해있다.
백제는 인근의 소실봉과 마북동의 주거지로 볼 때 안정적 생활을 영위하던 중 고구려의 남진으로 인해 5세기 후반 혼란이 시작되었으며, 고구려는 고분과 인근 주거지의 출토 유물 등으로 볼 때 이 지역을 영역적 지배하에 두지는 못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6세기 중반 신라의 북진으로 인해 강제적 영역화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급속한 물질문화의 변동으로 알 수 있다.
신라에 있어 보정동 고분군-마북동 유적-할미산성은 매우 유기적 관계에 놓여있다. 유적의 성격은 다르지만, 형성시기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 유적들은 6세기 중반부터 형성되었으며 마북동 유적과 할미산성은 인화문토기가 연속되어 출토되지 않아 7세 초 이후 공백기가 존재한다. 그러나 보정동 고분군은 통일기에도 지속적으로 조영되고 있어 집단의 변화 혹은 마을 유적의 이동이 추정된다. 또한, 같은 시기에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북동 주거지와 할미산성 출토 유물에서 친연성이 보이지만 보정동 고분군 출토품을 다른 점이 관찰되었다. 이는 집단보다는 수급지의 차이로 이해되며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적은 이유는 6세기 중반의 전시상황과 급격한 사민으로 인한 이주로 생산과 유통이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목차

요약
Ⅰ. 머리말
Ⅱ. 용인 보정동 일대의 고분군과 출토유물
Ⅲ. 출토유물을 통해본 시기 구분
Ⅳ. 고분의 축조 양상과 주변유적과의 관계
Ⅴ. 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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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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