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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병현 (대한민국 학술원)
저널정보
숭실사학회 숭실사학 숭실사학 제50호
발행연도
2023.6
수록면
275 - 336 (6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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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신라의 최고 지배세력이 횡혈식석실분을 수용하여 수도 경주지역에서 축조해 간 과정을 밝히고, 횡혈식석실분으로 축조된 신라 中古期와 中代의 왕릉들을 비정하고자 하였다. 신라에서는 횡혈식석실분이 수도 경주지역에 앞서 지방의 고분군에 먼저 도입되었는데, 그 구조로 보아 고구려 고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신라의 최고 지배세력이 횡혈식석실분 수용하여 경주지역에서 축조하기 시작한 것은 신라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공인한 직후인 서기 6세기 중엽부터였다. 앞서 횡혈식석실분을 축조하고 있었던 지방의 造 墓工人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며, 이때부터 경주분지를 둘러싼 산지에는 곳곳에 새로운고분군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신라 전기에 월성북고분군에서 적석목곽분을 축조하고 있었던 세력들이 집단별로 분지 주변의 산지를 점유하여 묘지를 옮겨간 것이다. 그 중 경주분지 서쪽의 서악동고분군이 최상위 위계로, 신라 중고기의 왕실집단이 이곳으로 묘지를옮겨 대고분군을 형성한 것이다. 경주지역에서 횡혈식석실분이 축조되면서, 신라 중고기 이후의 왕릉들도 횡혈식석실분으로 축조되었다. 중고기 초기의 왕릉들은 서악동고분군에 조영되었으며, 그 후기의 왕릉들은 경주분지 동쪽과 남쪽의 외곽에 자리하여, 후에 신라왕경 도시구획의 경계를 이루게한 것으로 보인다. 중대의 왕릉들은 경주분지를 벗어나 동남쪽 외곽으로 배치되었는데, 문무왕의 동해 水中陵을 향하는 교통로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왕릉들의 배치 질서까지도 무너져, 왕릉 배치의 기획성이나 왕릉들의 진행방향을 찾을수 없는 신라 下代의 왕릉 비정은 유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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