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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황종현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관)
저널정보
한국중세고고학회 한국중세고고학 한국중세고고학 제12호
발행연도
2022.12
수록면
5 - 31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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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중고기 후반에서 중대 초 왕경의 주변 산지에 군집하여 분포하던 횡혈식석실묘는 점차 감소한다. 왕경의 횡혈식석실묘 감소요인으로는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된 통일전쟁, 율령체제의 정비와 신분제의 강화, 불교의 대중화로 인한 내세관의 변화, 대대적인 왕궁과 왕경의 조성 등이 서로 맞물려 작용한 결과로 추론하였다.
통일기가 되면서 왕도의 석실묘는 태종 무열왕이 주도적으로 수용한 당제의 영향과 중고기에 비해 한층 엄격해진 신분질서로 인해 왕릉과 일부 귀족들이 조성한 극히 일부만 축조된다. 통일 후 귀족들이 조성한 횡혈식석실묘의 경우 무열왕이 주도한 유교적 숭조사상(崇朝思想)과 왕릉의 입지를 본받아 대릉원지구와 용강동·황성동 일대 평지에 축조된다. 평지형 석실묘의 경우 대릉원지구 마립간기 마립간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는 황남동 119호, 황남대총, 서봉총 등 초대형 적석목곽묘 주변에 입지하는 ‘평지 복귀형 횡혈식석실묘’와 북천 이북 황남동․용강동 일대 평지에 단독으로 입지하는 ‘평지 단독형 횡혈식석실묘’로 분류할 수 있다.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이후에는 안정된 정치 상황과 발전된 문화적 역량으로 신라의 왕릉은 다양한 석물과 십이지신상을 배치하는 등 더욱 화려해진다. 또 당 황제릉의 능원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그로 인해 왕릉의 입지는 왕도 외곽 산지로 이동한다. 이러한 왕릉의 능원제도를 모방한 일부 귀족들의 무덤 또한 더욱 화려해지며 외곽 산지에 독립적으로 축조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이 통일기 횡혈식석실묘의 감소, 입지의 변화, 내부구조와 외표시설 등의 양상은 중대 신라사회를 이해하는데 유의미한 고고학적 자료라 할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횡혈식석실묘 축조의 감소 원인
Ⅲ. 통일기 왕경의 횡혈식석실묘 전개양상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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