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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보람 (대전대학교)
저널정보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한국학논집 한국학논집 제88집
발행연도
2022.9
수록면
69 - 104 (36page)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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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고종은 흥선대원군을 정계에서 배제하고 친정을 선언했다. 고종의 친정 선언은 성인이 된 고종의 강력한 의지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 맥락과 정치집단의 동향까지 시각을 넓혀 분석할 필요가 있다. 대원군은 대대적인 농민항쟁과 철종 승하의 역사적 전환점을 거쳐 안동김씨 핵심 인물을 제외한 기존 집권세력 및 시무개혁 세력의 후원을 받고 정계의 핵심 인물로 등장했다. 하지만 집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원군은 독자적인 권력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행보를 보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척사론의 주창을 통한 여론의 지지기반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대원군은 민감한 천주교 관련 문제를 과감하게 수면 위로 끌어올리면서 여론의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병인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과 동시에 척화론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병인양요로 상징되는 외세의 침입에 대한 두려움을 자극했다. 이는 민에게는 공포정치를 통한 자신의 주도권 확보를, 지방 유생들에게는 이념적인 여론 주도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대원군의 이러한 방책은 지지 여론을 부정적으로 돌리게 하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병인양요로 서양 세력의 위협이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 조정부터 민간까지 여론은 현실적으로 화의론에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고, 경복궁 중건사업의 무리한 지속은 여론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대원군의 실각과 고종의 친정이 이루어지기까지 기존 집권세력과 시무개혁 세력은 10년 전 대원군이 집권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각기 역할을 담당하며 공조하였다. 최익현 상소로 친정 정국이 폭발되기 전 이미 1860년대 후반부터 각 정치세력은 대원군과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고종의 친정 선언 국면 전후로 기존 집권세력의 대표 이유원과 시무개혁 세력의 대표 박규수는 대원군측의 저항을 둘러싼 첨예한 대립 상황을 극단으로 치닫게 하지 않으면서 안정적으로 정권을 이양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목차

1. 머리말
2. 흥선대원군의 개혁노선 이탈과 실각
3. 반대원군 세력의 연합을 통한 고종의 친정
4.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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