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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은경 (덕성여자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미술사교육학회 미술사학 美術史學 第45號
발행연도
2023.2
수록면
91 - 116 (26page)
DOI
10.14769/jkaahe.2023.02.4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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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경덕진의 청화백자는 원대 후기 시장에 새롭게 출현한 신품종으로 원대 도자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실제 문헌기록과 출토양상을 보면, 원 황실은 도자생산을 중시 여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궁정 내 사용 역시 미비했다. 오히려 북방에서 쉽게 조달할 수 있었던 자주요를 저장용기 정도로 사용했을 뿐, 생활식기에는 주로 금은기와 옥, 마노 등 재질의 그릇을 선호했다. 비록 경덕진에 부량자국을 설치하긴 했지만, 정9품의 낮은 등급으로 자기 외에 칠기나 모자 등 다른 공예품도 같이 생산하는 등 자기를 전문적으로 소조하지 않았다. 부량자국의 주요 역할은 원 황실의 제례기 공급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지정년간(至正年間, 1341-1367)을 전후하여 청화백자 생산이 급증하였고, 활발한 해외수출과 함께 중국 내에서도 상류층 계급에서 청화백자의 소비가 확산되는 변화가 감지된다. 물론 여전히 원 황실의 자기에 대한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대신 관부무역의 형태로 자기를 소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터키나 이란 등 서아시아에서 전하는 다량의 경덕진 청화백자가 대표적 예이며, 막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었던 도자무역에 원 황실을 위시한 상류계급층은 당시 색목인 상인이었던 오르톡과 동업하여 적극 가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류층의 이윤추구 활동에 청화백자가 중요한 ‘도구’로 활용된 점은 원대 말기 자체적으로 청화안료가 생산되는 운남지역 청화백자 생산의 주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청화백자로 촉발되는 남방요장의 확대는 운남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베트남 청화백자 생산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베트남도 ‘청화백자’라는 신품종을 제작하기 위해 코발트안료를 경덕진(서아시아에서 수입된 안료)과 운남 토산 안료인 珠明料를 수입했기 때문에 사용 방법을 배워야 했고, 이는 인적교류를 통해 해결했을 것이다. 실제 베트남 청화백자 생산에 운남지역 가마, 즉 옥계요와 건수요의 역할이 일정 수준 미쳤을 것으로 여겨지므로, 몽골제국의 이슬람세계 정복 이후 운남에 정착한 상당수의 무슬림들 역할이 주목된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매우 익숙한 코발트안료를 다룰 수 있는 무슬림 장인집단이 경덕진 부량자국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점쳐지는 상황에서, 운남과 베트남 역시 이들을 통한 기술 전파도 배제할 수 없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원 황실의 도자 취향
Ⅲ. 청화백자의 생산과 남방요업의 흥기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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