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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세완 (復旦大學)
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136호
발행연도
2022.2
수록면
169 - 198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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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강국이었던 금국의 군사역량은 군대의 주력이었던 기병의 우세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건국 후 백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금군은 몽골의 침입을 맞아 기병의 약체화를 폭로당하였다. 필자는 그 원인을 금조의 군마부족 정황으로부터 찾았다. 금조는 건국 후 불과 10여년만에 거란을 멸망시키고 북송을 정복하면서 다량의 군마를 소모하였고 해릉왕의 남송침공이 실패하면서 경내의 마필이 거의 고갈되었다. 금조는 다양한 조치를 통해 자체적으로 군마보유량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요대 이후 농업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경내의 목장들이 크게 감소하였고, 금조가 여진, 거란 등의 맹안모극호들에게도 농경을 권하였기 때문에 군마부족을 자생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군마자원 중 상당수를 외부로부터의 유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시기 외부로부터의 군마유입도 점차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북방 몽골고원은 통일을 위한 總力戰에 돌입하게 되면서 사실상 외부로 군마를 流出 할 여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西夏는 원인은 분명치 않으나 北宋後期 무렵부터 금조보다 더 심각한 군마부족현상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나 금조로 군마를 수출할 여력이 없었다. 吐藩은 몽골로부터의 마필 유입이 어려워진 금조에 몇 차례 마필을 輸出했던 기록이 있으나 단발적인 사건으로 그쳤는데 아마도 재정적인 여력이 부족한 금조가 남송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남송으로 향하던 마필을 장기적으로 수입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남송이나 고려는 마필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지역이 아니었고, 위구르도 금조로 수출한 물품 중에 마필이 보이지 않는다. 비록 외부지역은 아니지만 국가 성립 이전에 마필을 대량으로 생산했던 金源內地도 건국이후에는 인구가 대량으로 流出되었고 마필의 필요성이 대폭 감소했기 때문에 대량의 마필을 생산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요컨데 금조는 이런 대내외적인 환경 때문에 군마를 확충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해릉왕의 남송침공 이후 군마부족으로 인한 각종 조치가 남송침공으로부터 16년이 지난 시점까지 나타났던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장종시기 다시 북변의 몽골계 민족의 침입과 거란 덕수, 타쇄의 난, 규인의 소동 그리고 남변의 개희북벌을 겪으면서 금조는 다시금 군마를 대량으로 소모하였고 군마고갈상태를 회복하지 못하고 3년만에 몽골의 침입을 받았다. 따라서 금군은 군마가 부족한 상태로 전쟁에 임할 수 밖에 없었고 군마부족은 몽골의 침입을 맞았을 당시 금조 군사력 약화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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