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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동선 (서울역사편찬원)
저널정보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09호
발행연도
2021.12
수록면
167 - 207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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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윤은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로 해방 이후에는 관료로 활동하였다. 그의 활동범위는 국내와 미국에 걸쳐 있었고, 활동내용도 다양하였다. 그럼에도 그의 활동은 상당한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활동 저변에는 안창호계의 독립운동 사상과 좌우합작을 기반으로 한 민족의 통일이라는 의식이 깔려있었다. 그것은 그의 민족의식 성장배경과 인맥형성과정에 따른 결과였다. 최봉윤은 미국에서 흥사단에 가입하고, 흥사단계 인물들과 함께 활동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중국후원회와 조선의용후원회에서 참여하였다. 이 단체들은 조선의용대와 조선민족혁명당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김규식을 주석으로 하여, 무장독립노선을 지지하던 단체였다. 이 단체에 참여한 인물들은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외교노선보다는 무장투쟁을 중시하였는데, 최봉윤 역시 이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본이 일본제국주의 침략 정책의 결과로 다른 나라와 침략 전쟁을 일으키는 때, 우리가 독립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독립의 기회를 잡기 위한 방법으로 무장투쟁을 지지하였다. 해방 후, 그는 미군정의 관료로 고국에 돌아왔다. 그는 미군정 공보부 여론국 정치교육과에서 군정의 입장을 대변할 자료를 만들고, 한국인들에게 민주주의를 보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시기 최봉윤은 김규식?안재홍 등 중간파 정치인들을 긍정적으로, 이승만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것은 해방이전 그의 행적과도 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 번영을 무엇보다 우선시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바로 민족의 ‘통일’이었다. 따라서 그가 단정을 지지했던 이승만과 그 지지자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48년 8월 미국으로 돌아간 최봉윤은 이후에도 그는 한국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의 민족통일관을 정리했다. 그는 남북통일 방략으로 ‘한반도 영세중립화’를 제안했다. 그는 한국문제 해결은 미국?소련?중국?일본에 의해 보장되는 한반도의 영세 중립이라고 하였다. 최봉윤의 이러한 국가관 및 남북통일관은 흥사단계 중간파의 의식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족자주연맹 등에 참여한 흥사단계 인물들은 남북좌우가 통일 단결하여 완전한 독립을 이루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 또한 이들은 남북협상의 목적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합치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통일관은 당시 남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였다. 최봉윤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냉전체제 하에서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고, 그가 오래 생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일제강점기 안창호 계열 독립운동을 일환이기도 하고, 해방 후 한국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발전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까닭으로 향후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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