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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邊東明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72호
발행연도
2018.11
수록면
1 - 31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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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州 西城門 안 石燈’은 高麗의 宣宗 10년(1093)에 세워졌다. 竿柱石의 銘文을 통해 건립된 경위를 파악할 수 있는 희귀한 석등으로서, 일찍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문화재로 지정 보호를 받아 왔다. 이 글에서는 간주석의 명문을 주요 자료로 삼아, ‘나주 서성문 안 석등’의 건립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헤아리고자 하였다. 명문을 해독하는 데서 검토를 시작하여, 석등이 건립되기에 이른 경위를 살핀 다음, 석등의 건립이 의미하는 바를 나주 지역사회의 추이에 비추어 더듬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나주 서성문 안 석등’은 戶長 羅在堅을 필두로 한 나주 토착세력의 주도 아래 세워졌다. 저들은 나주의 中興里 아마도 興龍寺에 이 석등을 건립하여 惠宗?顯宗과 나주 사이의 남다른 연고를 강조해 내세우고자 애를 썼다. 그리하여 나주 지역사회 더욱이 그 주도세력인 자신들이 고려왕조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사실을 거듭 상기시키면서, 왕실과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태평을 앞세운 가운데 그러한 속에서 자신들이 길이 부귀를 누리기를 기원하였다. 그로써 나주고을과 그 대표자인 자신들의 존재감을 안팎에 과시하며, 나주 지역사회가 정체 내지 쇠락의 조짐을 보이는 현실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였다. ‘나주 서성문 안 석등’은 11세기 말엽 즈음 나주의 유력한 토착세력으로서 호장 나재견을 배출한 나씨의 존재를 후대에 전하는 자료이기도 하였다. 고려시기 나주에서는 지역사회를 이끌던 유력한 토착세력이 시기에 따라 변화하였다. 土姓들의 消長盛衰에서 그 양상을 살필 수가 있는데, 吳氏에서 羅氏와 鄭氏를 거쳐 고려말 조선초에는 대략 羅?鄭?朴?陳의 순으로 호장층을 배출하며 나주의 대표적인 토착세력이 자리를 잡았다. 한데 그러한 흐름에서 실체가 모호하던 고려전기 토착세력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도록 실마리를 제공한 게 ‘나주 서성문 안 석등’이었다. 자료의 공백기인 고려전기에 활동한 戶長 羅在堅의 존재를 이 석등이 확인시켜 줌으로 해서, 당시 나주 지역사회를 이끌던 유력한 토착세력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주도세력의 변화와 같은 전통시기 나주 지역사회 내부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의 전승이라는 측면에서, 나주 서성문 안 석등의 건립에 담긴 바 사회적 의미는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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