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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영문 (숭실대학교)
저널정보
온지학회 온지논총 온지논총 제69호
발행연도
2021.10
수록면
47 - 76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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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협(金昌協)은 17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문장가이면서 유람객이다. 그는 21살 되던 1671년 8월 11일부터 9월 11일까지 1달 동안 관동지역(금강산과 동해)을 유람하였다. 금강산만 유람하고 돌아오려던 여행이었지만, 권세경(權世經)의 권유로 동해안으로까지 유람 지역을 확대한 것이다. 이때의 유람을 일기체로 기록한 것이 <동유기(東遊記)>이다. <동유기>에 나타나는 서술상의 특징으로는 첫째, 김창협은 『농암집(農巖集)』에 567題의 한시를 남겼지만, <동유기>에는 한시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 둘째, <동유기>가 12편의 짧은 기(記)를 결합하여 완성했다는 점이다. 김창협은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산수에서 흥취(興趣), 유묵에서 아취(雅趣), 승려와의 관계에서 정취(情趣)를 느꼈다. 이러한 감정은 유람을 떠나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현상이지만, 각인각색의 정감이기 때문에 단순화시켜 말하기는 어렵다. 김창협은 금강산을 유람한 이후에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잊지 못하여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애당초 보지 못했던 때보다 더 간절해진다.”고 말할 정도로 잊지 못하였다. 이후 오랫동안 유산(遊山)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또한, 김창협은 유람지에 있는 바위나 누정 등에 적혀있는 이름과 유묵을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제명(題名)을 남기려고 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흥취를 즐기는 여흥인 동시에 동류들과 소통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금강산을 유람하는 동안 김창협은 이전의 사대부들과는 달리 승려들과 성리학에 관해 논쟁하기보다 불교와 승려에 대해 긍정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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