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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장효정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동국사학 동국사학 제71호
발행연도
2021.8
수록면
5 - 45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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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년에 환도성을 수즙하고 국내성을 쌓은 고국원왕은 환도성으로 이거하였다. 이것은 보통 집안지역 내에서의 왕의 이동으로 보고, 전연과의 전쟁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추진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사실 대규모 인력동원을 요구하는 두성에서 이루어진 축성의 사건을 전쟁 직전에 실행했던 점에 의문을 갖고 다른 이유가 있는지 고민해보았다. 당시 평양지역에서 통치하던 고국원왕은 평양성을 증축하고 신성을 축조하여 평양 및 요동지역을 안정시킨 뒤, 환도성으로 이거하였다. 이것은 전연과의 전쟁에서 동진과의 교류보다는 후조와 우문부와의 연계가 더 우선시되었고, 또 집안지역이 평양지역보다 전쟁에 더 유리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고 분석하였다. 나아가 전연의 공세로부터 부여지역을 공고히 하려고 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다만, 국내성의 축조는 꼭 전쟁대비만이 아닌 고국원왕의 원대한 계획에 의해 추진된 것으로 설명하였다. 국내성은 당시 많은 중국의 이주민들을 포함한 주변 백성들을 보호 관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왕권의 초월적 위상을 표출하기 위한 상징적인 구조물이었다. 고국원왕은 『주례』 고공기에 입각한 왕궁이 중앙에 위치하는 정방형의 국내성을 쌓아 이상적인 예적 질서의 공간적 왕성을 구현하려고 했다고 이해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고대인의 우주론적 상징체계 관념을 제시하고 그것을 정치적인 통치수단으로 사용하고자 계획하였다고 보았다.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평면 형태인 방형의 국내성 축조의 세계관은 태왕호 인식과 맞물려 이어지는 일련의 태학설치 및 율령반포 등의 제도적 완성으로 나아가는 중앙집권화의 노력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동아시아 도성사에서 국내성이 가지는 의미를 조금 더 자세히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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