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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오상욱 (부산대학교)
저널정보
한국한문학회 한국한문학연구 한국한문학연구 제62호
발행연도
2016.6
수록면
299 - 338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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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년 金志를 비롯한 彦陽의 유림들은 반구대 상징화의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1712년에는 언양의 반구대와 관련된 三賢(圃隱?晦齋?寒岡)을 모신 반구서원을 건립하고, 이듬해 1713년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리고 동 시기에 集淸亭이 건립되면서 반구대 상징화는 절정을 이뤄 반구대를 찾는 문인들은 더욱 많아진다. 특히 良洞문인들이 조상참배와 도통연원을 목적으로 반구서원을 찾아 참배하고, 반구대의 경치를 즐겼고, 빼어난 경치를 품은 반구대 일원은 포은과 반구대가 結付되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膾炙된다. 앞서 언양의 유림들은 울산부의 구강서원 건립과 사액을 받은 일에 대해 자극 받아, 언양 역시 서원을 건립해 지역의 발전과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런 상황에 三賢과 언양의 관계를 지나치게 천착해 의도적으로 반구대와 결부시켜 반구서원을 건립하였다. 서원 건립 후 三賢의 참배로 반구대가 명성을 얻었고, 집청정이 건립되면서 반구대는 언양의 명소로 탈바꿈한다. 결국 포은과 반구대를 천착하면서까지 언양과 반구대를 연결짓고자한 의도는 언양유림의 순수하지만 모순된 마음에서 빚어진 결과였으며, 이는 단순 지방유림만의 문제가 아니라, 재지사족과 가문 존속의 연관관계에 의한 집단행동이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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