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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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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논총 동북아역사논총 제81호
발행연도
2023.9
수록면
287 - 330 (4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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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간섭기의 당대사 편찬은 이 시기 역사학의 특성 중의 하나로 규정되고 있다. 하지만 그 결과로 편찬된 역사서가 온존하게 전해지지 않아 내용과 성격을 파악하는 데 많은 한계가 있다. 이 글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원의 역사 편찬 동향을 살펴보고, 그 토대에서 고려의 역사 편찬에 대한문제를 검토하고자 했다. 그 범위는 1278년 11월의 본국누조사적(本國累朝事跡)과 당대사(當代史) 편찬으로 한정하고자 했다. 이것은 원의 대일통을 역사 편찬을 통해 확인하고자 편찬했던 『제국신복전기(諸國臣服傳記)』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원의 요구로 이루어졌던 역사 편찬은 증수와 개찬이 반복되었고, 그런 가운데 고려에서도 정체성과 국익을 위해 자국의 입장을 적극 개진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본국누조사적 편찬의 첫 번째 결과는 정가신의『천추금경록』이었다. 이를 대상으로 두 차례 정도의 개찬이 이루어졌는데, 첫 번째 결과가 오양우의『국사(금경록)』였다고 추측된다. 1291년 정월에는 원의 쿠빌라이와 국사원 편찬책임자, 고려의 세자와 편찬책임자가 모인 대담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는 민지의『세대편년절요』로 개찬되었다. 또 원과의 역사 논쟁을 위해 충선왕은 고려역대실록 185책을 반출하여 근거로 활용하기도 했고, 원의『고려지』편찬에 이용되기도 했을 것이다.
당대사 편찬의 요구는 원부의『고금록』으로 마무리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고려가 원에 귀부한 날짜에 대해서 양측의 이견이 있었고, 그 시각은 원을 중심으로 정리되면서도 고려의 입장 역시 적극 개진되었을 것이다. 원에서 고종의 시호가 내려오기 1년 전인 1309년부터『고종실록』을『충헌왕실록』으로 개찬한 것도 이와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다.
충렬왕과 충선왕 때 편찬된『천추금경록』·『국사(금경록)』와 『세대편년절요』, 『고금록』은 1278년 11월 원 중서성에서 요구된 본국누조사적과 당대사 편찬과 관련이 있다고 추론된다. 편찬과정에서 원은 적극 개입하여 그들의 입장에서 개찬하기를 요구했고, 그 결과를 확인하고자 했다. 그런 가운데 고려에서도 정체성과 국익을 위해 적극적인 역사 논쟁을 전개했다. 입성책동의 저지, 주구유 살해 원인에 대한 개찬 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원의『제국신복전기(諸國臣服傳記)』편찬과 역사 편찬 요구
Ⅲ. 본국누조사적(本國累祖事跡)과『천추금경록』·『세대편년절요』
Ⅳ. 신복 일월(臣服日月) · 황제 등극 이래 국왕 친조 연월(帝登極已來 國王親朝年月)등과『고금록』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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