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의약학
농수해양학
예술체육학
복합학
지원사업
학술연구/단체지원/교육 등 연구자 활동을 지속하도록 DBpia가 지원하고 있어요.
커뮤니티
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와 전문성을 널리 알리고, 새로운 협력의 기회를 만들 수 있는 네트워킹 공간이에요.
초록·키워드
李穀이 원 御史臺를 대신해서 쓴 상서문 「請破取童女書」는 당시 원의 사신들이 황제의 명으로, 혹은 황제의 명을 칭탁해 고려에서 동녀를 데리고 가서 궁 안에 두거나 사신 개인의 잇속을 챙기는 것을 금해줄 것을 요청한 글이다. 이 글은 이 시기 공녀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서, ‘몽골과의 관계 내내 몽골의 요구로 고려 여성들이 끌려가서 비참한 삶을 살았다’라고 하는, ‘공녀’와 관련한 서사가 구축되는 데에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이 글은 원 조정에 대한 요청이라는 목적을 갖는 글이기에 ‘공녀’에대한 모든 사실을 전하고 있지는 않으며, 따라서 그에 기반한 공녀 관련 서사 또한 편향성을 갖는다. 이에 연대기 자료에 보이는 공녀 관련 기록을 모아 그 양상과 추이를 살펴보면, 달리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첫째, 몽골 측의 요구에 따라 동녀 선발 및 몽골행이 이루어지는 사례는 시기별로 그 양상에 큰 차이가 확인된다. 몽골은 전쟁을 수행하던 시기인 1270년대 중반, 군사의 처를 구하기 위해 고려에서 ‘남편이 없는 여성’들을 대거 동원한 바 있으나, 이러한 유형의 ‘공녀’는 몽골에서 정복전이 종식된 후로는 더 확인되지 않는다. 이곡이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은 유형의 ‘공녀’ 사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1307년에 이르러서이다. 이때는 武宗 카이샨이 제위 계승 분쟁을 거쳐 황제위에 오르고 고려에서도 그를 지지했던 충선왕이 복권하는 시점으로, 정황상 무종이 즉위 과정에서 자신의 기반이 되어준 세력에 대한 賜與 차원에서 고려 良家의 여성을 동원한 데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무종 즉위에 공을 세웠던 충선왕의 역할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고려 측, 정확히는 고려국왕의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사례가 다수 확인된다. 이는 이곡의 글에서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은 ‘공녀’ 유형으로, 1298년 충렬왕과 충선왕의 重祚 정국 및 충렬왕 복위 후 양왕 세력 간 정쟁 상황 등 여러 정치적 분쟁 상황에서 확인되며, 이후 공민왕 대까지 이어진다.
몽골과의 관계 속에서 행해진 ‘공녀’의 양상이 보여주는 시기별 추이 및 복합적 배경에 대한 검토 결과는 ‘공녀’의 배경이 되는 고려-몽골 관계를 딱히 몽골의 압제 및 간섭과 고려의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관점에서만 볼 수 없음을 드러낸다.
본문·목차
인공지능 문자 인식 모델을 통해 추출된 텍스트로, 일부 오타나 오류가 포함될 수 있으나 지속적으로 개선 중입니다.
오류를 발견하셨다면 해당 부분을 드래그한 후 ' 를 통해 신고해주세요.
오류를 발견하셨다면 해당 부분을 드래그한 후 ' 를 통해 신고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