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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조종성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중국학회 중국학보 중국학보 제107권
발행연도
2024.2
수록면
201 - 230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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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조에게 있어 검남도는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었을 뿐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토번⋅남조 등 강성한 인접국과 대항하는 등 군사적 중요성도 높은 지역이었다. 숙종은 이러한 검남도를 검남서천과 검남동천 2개의 번진으로 분할시키는데, 이러한 결정은 검남도가 독립 세력화하는 위험을 낮추기 위함이었다. 이 중 검남서천 번진이 검남도의 치소였던 성도를 비롯하여 국경과 인접한 지역 전체를 관할하였고, 검남동천 번진은 배후지에 위치한 9개 주만을 관할하였으나 그 9개의 주 가운데 장안에서 검남도로 진입하는 요충지 검각이 소재한 검주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검남도를 2개의 번진으로 분할한 숙종의 조치는 기본적으로 검남도를 기반으로 한 반란 발생의 가능성을 낮추는 한편, 설령 군사력과 생산력을 겸비한 검남서천 번진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이를 쉽게 진압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목적 하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럴 경우 비록 생산력이 뛰어난 지역이라고는 하나, 무거운 군사적 부담을 짊어진 검남서천 번진의 경우 이러한 분할 조치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만큼 검남서천 번진을 총괄하는 절도사의 인선은 매우 중요하였으며, 안사의 난 이후 최녕이 13년, 위고가 21년을 검남서천절도사로 재직함으로써 사실상 8세기 후반은 이 두 명이 검남서천절도사 직을 전담하다시피 한 것 역시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중 절도사로 21년을 복무한 위고의 경우 행정적 재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우수한 성과를 거두니, 이로써 위고 치하의 검남서천은 ‘蜀道易’라 할 만하다는 명성을 얻을 정도였다. 이에 위고의 사후 조정에서는 그를 太師로 추증하고 諡를 忠武라 하였으며, 정사에서의 贊 또한 비록 약간의 문제는 있었으나 위고가 충신이라는 서술 기조 자체는 유지하였다. 하지만 덕종의 사후 위고가 보인 행보는 단순히 약간의 문제가 있는 수준을 넘어 검남도의 독립화, 더 나아가서는 반란 준비로까지 해석될 수 있는 심각한 것이었다. 위고는 덕종이 죽은 후 갓 등극한 순종 황제의 측근인 왕숙문에게 유벽을 사절로 보내어 검남서천⋅검남동천⋅산남서도 삼천의 都領을 요구하는데, 이는 숙종이 검남도를 분할한 목적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다. 왕숙문이 해당 요청을 거부하자 위고는 이에 왕숙문과 왕비가 간사하다며 고발하는 한편, 황태자의 감국을 청함으로써 왕숙문에게 정치적인 보복을 가하였다. 이후 순종이 황태자에게 양위하여 헌종 황제가 등극하고 왕숙문 등이 제거된 시점에 위고 또한 급사하게 된다. 다만 위고의 사후 검남서천의 유후로 자칭한 유벽은 조정에 자신을 절도사로 임명해주도록 압박하여 결국 허락을 받아냈으며, 그 이후에는 위고의 생전에 왕숙문에게 요구한 삼천의 都領을 재차 헌종에게도 요구하였다. 덕종 중후반기의 외교적 성과를 통하여 검남서천과 접경한 토번의 공세가 크게 약화되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요구는 분명 과도한 것이었다. 이에 당조는 고숭문에게 유벽의 토벌을 명령하였고, 고숭문은 산남서도를 통하여 사천 분지에 진입한 뒤 검남동천에 대한 포위망을 풀고 마침내는 유벽을 사로잡음으로써 반란을 종식시켰다. 이를 통하여 당조는 검남서천 번진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이후 당조는 검남서천절도사의 재직 기한을 7년이 넘지 않도록 제한하는 등 특정 인물의 장기간 절도사 임직을 제어하였다. 당조는 검남서천 번진 이외의 여타 지역에 대해서도 절도사의 재직 기간을 5년 내외로 조절하는 조치를 취하였고, 이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당조는 순지로 구분되는 번진 전반을 제어하는 이른바 ‘원화중흥’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후에도 당조의 번진 정책은 하북도 인근의 일부 번진을 제외한 나머지 순지 번진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는 이원적인 형태로 이후 황소의 난 이전까지 거의 그 틀을 비슷하게 유지하였다. 검남서천 번진은 당조가 안사의 난 이후 일반적으로 순지로 구분되는 번진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는 과정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서, 당 후기의 번진 정책을 살펴봄에 있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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