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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현숙 (원광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서예학회 서예학연구 서예학연구 제44호
발행연도
2024.3
수록면
5 - 36 (32page)
DOI
http://dx.doi.org/10.19077/tsoc.2024.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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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 서예사에서 왕희지 집자비의 출현과 전개 양상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의 왕희지 집자비와 당나라 왕희지 집자비 글씨를 비교했더니 한국 왕희지 집자비 글씨의 특징이 저절로 드러났다. 조선의 집자비 2기는 사적 용도이며 시대가 멀어 비교 대상에서 제외했다. 왕희지 집자비는 7세기 후반에 중국 당나라에서 처음 건립되었고, 그 영향으로 한국에서는 8세기 통일신라에서 처음 건립되었다. 통일신라의 첫 왕희지 집자비는 <皇福寺碑>이며, 다음은 801년에 건립된 <鍪藏寺碑>, 마지막은 886년에 건립된 <沙林寺碑>다. 그중 명문으로 확인되는 것은 <사림사비>며, 나머지는 추정되는 것이다. 현전하는 고려의 왕희지 집자비는 1295년에 건립된 <麟角寺碑>뿐이다. 중국에서는 당 태종(재위 626-649)을 시작으로 이후의 황제들이 대를 이어 왕희지의 글씨를 애호했기 때문에 왕희지 집자비는 대부분 황명으로 건립되었다. 대표적인 것은 고종대(649-683)의 <大唐三藏聖敎序>(<集字聖敎序>, 672), 현종대(713-755)의 <興福寺斷碑>(721), 문종대(827-840)의 <金剛經>(832)이다. 집자는 주로 승려가 담당했는데 이런 전통이 이어져 통일신라와 고려의 집자비도 왕명으로 승려가 집자했다. 통일신라의 <황복사비> 글씨는 당나라의 <집자성교서> 글씨와 흡사하다. 글씨, 비문 머리의 서술 양식, 문장의 배열 형식이 <집자성교서>와 흡사하여 왕희지 집자비로 볼 수 있는 <무장사비>는 당나라의 <집자성교서>, <흥복사단비>처럼 승려, 특히 황룡사 승려가 집자했을 가능성이 크다. 옹방강이 언급했듯이 <무장사비> ‘崇’의 상부 세 점의 필법이 왕희지의 <난정서>와 흡사하고 더 나아가 <난정서>를 저본으로 한 <집자성교서>와 흡사한 것도 하나의 근거다. 그리고 세로 계선만 그었으나 자간도 정연한 것, 해서의 필의가 많은 것, 개성적인 글자의 특징은 고려의 <인각사비>와 닮아 <인각사비>의 집자승인 죽허가 <무장사비>의 글씨를 따랐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왕희지 집자비는 당나라 <집자성교서>와 <흥복사단비>를 저본으로 했기에 字體가 닮기는 했으나 書風은 조금 다르다. 중국 왕희지 집자비 글씨는 行氣가 많아 유려하지만 한국 집자비 글씨는 해서의 필의가 강해 瘦硬하다. 그리고 중국 글자와 다른 특징적인 글자는 한국 집자비들끼리 닮기도 하여 고려 <인각사비>의 집자승 죽허가 중국 두 비에서 집자하면서, 동시에 전대인 통일신라의 집자비도 참고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통일신라의 왕희지 집자비는 고려의 집자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향을 받은 고려의 글씨가 영향을 준 통일신라의 글씨보다 더 유창하다. 이는 송나라, 원나라와의 빈번한 문화적 교류로 인해 고려 사회 전반에 행초서가 성행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중국의 왕희지 집자비 글씨가 다른 것도 나라, 시대, 그리고 집자인이 다르기 때문인데, 이는 시공의 차이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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