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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소희 (영남대학교)
저널정보
역사문화학회 지방사와 지방문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27권 제1호
발행연도
2024.5
수록면
51 - 82 (32page)
DOI
10.23013/localh.2024.27.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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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담 박수춘은 17세기 밀양의 대표 사족이다. 그는 일생 동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굴직한 사건을 경험하고 향약시행과 향안 중수 등을 통해 어지러운 향촌을 정비시켜 나갔다. 동향 출신의 손기양에게 공부를 배우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한강 정구에게 수학하였다. 전란후 그는 밀양부 속현인 풍각현으로 이거하여 국담헌을 짓고 한강학파의 일원으로서 인근 사족들과 교유를 이어나갔다.
그의 교유관계는 대체로 낙동강 연안 지역을 따라 한강학파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전란을 통해 인연을 맺은 강좌 지역 인사들도 다수 확인된다. 또 병자호란기 영남으로 내려온 해평윤씨 윤순지 형제들과의 교유도 눈에 띈다. 이후 그는 국담헌에 기거하며 손기양ㆍ정구로부터 배운 학문을 밀양 지역 후학들에게 전수해 주었다.
1652년 박수춘이 세상을 떠나자 밀양 유림들은 사우 건립과 효행 정려를 통해 그를 기리고자 하였다. 먼저 이들은 박수춘이 기거했던 풍각현에 사당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685년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풍각현이 대구부로 변경됨으로써 불가피하게 박수춘의 후손들이 일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에 밀양 유림들은 효행 정려에 집중하였으나 그 역시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밀양 유림들이 추진한 사우 건립과 효행 정려는 박수춘을 추모하고자 함도 있지만 당시 향촌 사족의 분열 속에서 그들만의 결집과 지역 내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함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목차

초록
1. 머리말
2. 국담 박수춘의 교유망
3. 국담 박수춘 사후 후대의 현창사업
4.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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