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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영웅 (강원대학교)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98호
발행연도
2025.2
수록면
225 - 260 (36page)
DOI
10.21490/jskh.2025.2.98.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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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동 72현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에서 한평생 出仕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고려 遺臣들을 말한다. 두문동 72현은 조선 후기에 와서 영조에 의해 고려의 충신으로서 현창되기 시작하였다. 두문동 72현에 대한 인식의 변천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로 18세기 중반 영조의 현창을 통해 ‘두문동 72현’에 대한 인식이 형성된 시기이다. 영조는 1740년(영조 16) 부조현을 방문하고 ‘不朝峴’이라는 글씨를 새긴 비석을 세웠다. 1751년(영조 27)에는 두문동에 ‘⾼麗杜門洞七十⼆忠臣’을 새긴 비석과 함께 제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때 영조는 두문동으로 밝혀진 인물이 임씨와 조씨, 둘뿐이었음에도 두문동의 인원을 72명으로 명명하였다. 둘째로 두문동 72현에 대한 인식은 두문동 72현의 인물을 점진적으로 규명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영조의 현창 이후 각종 역사서 및 문집에서 고려 충신들과 함께 두문동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두문동 72현의 인물이 제시되면서 공론화되었다. 1783년(정조 7)에는 두문동 72현의 인물을 배향하기 위한 表節祠가 건립되었다. 지방 각지의 유생들은 事蹟을 근거로 두문동 72현의 인물들을 제시하여 표절사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였다. 한편, 개성의 지방지에서 두문동의 위치에 대한 전승이 다양화되어 나타나기도 하였다. 셋째로, 19세기 후반, 두문동 72현이 문집을 통해 대대적으로 서술되면서 명단으로까지 제시되는 시기이다. 그러나 두문동 72현 명단은 고려 충신들을 통칭하여 명단에 포함하였고, 선정 기준과 절의에 대한 가치 평가가 모호하였다. 이러한 두문동 72현 명단의 불완전성은 두문동 72현에 대한 정립과 72명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두문동 72현’ 인식의 변천과정은 ‘두문동’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72현’이라는 유학적 개념이 결합되어 ‘두문동 72현’으로 불완전하게 상징화되고, 이에 맞추어 失傳된 인물을 발굴해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두문동 72현’ 인식의 형성 과정
3. 표절사 배향 및 ‘72현’에 대한 점진적 규명
4. ‘두문동 72현’ 명단의 출현과 한계
5.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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