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은 중국의 56개 민족 중의 한 개 소수민족으로서 연변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조선족은 중국 내의 다른 소수민족과는 달리 한반도에서 이주한 민족이다. 따라서 조선족의 음악문화는 한민족 음악문화의 한 지류로 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조선족 민요의 전승 현황과 변용에 대한 음악적 연구를 민요의 음조직 분석을 중심으로 진행하였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Ⅱ장에서는 먼저 조선족 사회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고 기존 조선족 민요의 분류를 재검토하였다. 다음은 새로운 분류에 따라 조선족 민요의 전승과정을 살펴보았다.
연변지역에 조선족이 이주해 온 것은 1860년 이후부터 1945년 광복까지이다. 조선족의 초기 이주시기는 1860년대부터 1910년까지로 보았고 이 시기의 이주는 대부분 빈곤화에서 이루어졌음을 밝혔다. 후기 이주시기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로 보았고 이 시기의 이주는 주로 일제하에 이루어졌음을 밝혔다. 조선족의 중국으로 이주는 해방과 함께 종결되면서 중국의 일원으로 조선족 사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반도의 민요는 이주민과 함께 새로운 중국 땅에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조선족 민요는 향토민요, 통속민요, 신민요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향토민요는 다시 기능에 따라 노동요, 의식요, 유희요로 세분하여 그 전승현황을 살펴보았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노동요에는 農産勞動謠, 水産勞動謠, 林山勞動謠, 工産勞動謠, 土建勞動謠, 商業勞動謠, 家事勞動謠가 전승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전승된 것은 농산노동요이다. 의식요에는 祈願儀式謠, ?邪儀式謠, 通過儀式謠가 전승되었다. 유희요에는 歌唱遊戱謠가 가장 많이 전승되었다. 가창유희요에는 非技能唱曲謠와 非技能辭說謠가 많은 수량을 차지한다.
통속민요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의 축음기회사가 한반도에 들어오면서부터 향토민요와 분리되어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이런 통속민요는 전문 소리꾼에 의한 방송매체 또는 SP음반을 통해서 조선족사회에 유입되고 전승된다.
신민요는 일제지배시기의 1930년대부터 생성되어 전승되지만 그 수가 매우 적다.
이상 향토민요, 통속민요와 신민요는 주로 메나리토리, 경토리(진경, 반경), 육자백이토리, 수심가토리로 나타난다. 그 중 메나리토리와 경토리가 대부분을 이룬다.
Ⅲ장에서는 조선족 민요의 음조직 분석을 통해 그 음악적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족 민요는 음조직에 따라 메나리토리, 경토리(진경, 반경토리포함), 수심가토리, 육자백이토리의 네 가지로 귀납할 수 있다. 위의 네 가지 토리 중에서 향토민요에는 메나리토리가 가장 많고 통속민요에는 경토리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수심가토리나 육자백이토리는 향토민요 또는 통속민요에서도 적게 활용되었음을 확인 하였다. 둘째, 메나리토리는 향토민요 중의 노동요와 통속민요 중의 아리랑류 악곡에서 많이 사용된다. 반면 경토리는 통속민요 중의 타령류 악곡에서 많이 사용된다. 셋째, 메나리토리는 두만강 연안지역(용정, 연길, 화룡, 도문, 훈춘)과 기타 지역에 골고루 나타나고 경토리는 문화의 중심지인 용정과 연길에 많이 나타난다.
Ⅳ장에서는 조선족 민요의 역사와 변화를 민요의 流入期와 傳承ㆍ沈滯期 및 變容期의 세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족 민요의 流入期는 향토민요의 전래기와 통속민요ㆍ신민요의 편입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향토민요의 전래기는 초기 이주시기로 보았고 통속민요와 신민요의 편입기는 후기 이주시기로 보았다. 초기 이주시기 향토민요는 절대 다수가 이주민에 의해 용정 지역(연길, 도문, 화룡, 훈춘)을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또한 이들 이주민 다수가 함경도 출신이기에 용정지역에는 안도, 왕청, 돈화 등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메나리토리가 많이 전승되었다. 한편 통속민요와 신민요는 조선족의 이주와도 관련은 있겠지만 향토민요와는 달리 주로 음반매체를 통한 것과 유랑극단의 공연 등 사회화경의 변화에 따라 전승된다. 따라서 이들 민요에는 한반도 문화중심지인 경기도 민요, 경기창으로 부르는 민요가 많은 수를 차지한다. 다시 말해서 통속민요와 신민요는 향토민요처럼 이주에 의한 지역적 특징은 나타내지 않지만 연변 지역의 문화 중심지였던 용정과 연길에 많이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조선족 민요의 傳承과 沈滯期는 1950년부터 1976년까지로 보았다. 이 시기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대두되면서 민요의 전승에 큰 영향을 준다. 그것은 1950-1976년에는 사회주의 사실주의가 강화되면서 가사내용이 건전하지 못하거나 종교와 관련된 것은 모두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민요 중의 의식요는 제일 먼저 소실되어 대부분이 전승되지 않았다. 노동요는 1970년대 중반부터 이앙기 등 기계화의 농사법이 도입되면서 논농사요가 사라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되었다. 또한 물레방아, 베짜기 등 노동은 사회주의 제도 하에서 여성의 지위가 상승됨에 따라 점점 멀리하게 된다. 따라서 이에 관련된 민요도 점차 줄어들게 된다. 유희요는 노동요와 마찬가지로 사회 환경과 생활방식의 변화에 따라 줄어들게 된다. 즉, 사회체제에 따라 많은 제약성을 받게 된다. 그것은 기타 민요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진행되는 정치운동 속에서 배태되는 ‘혁명성가요’, ‘전투성가요’, ‘숭배가요’, ‘어록가요’ 등을 대량적으로 보급시키고 의무적으로 불러야만 했었기에 민요가 설 자리를 좁혀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관련된 민요도 점차 줄어들게 된다.
셋째, 조선족 민요의 변용기는 중국의 개혁개방시기와 연관시켜 조명하였다. 조선족 민요의 변용 양상은 북한 음악문화의 영향과 한국 음악문화의 영향에서 나타난다. 조선족 민요는 사회주의 개혁개방시기에 접어들면서 다시 해 빛을 보게 된다. 하지만 향토민요는 예술기관인 연변대학음악학원과 음악단체인 연변가문단과 연길시조선족예술단 등 전문기관 또는 전문단체에서 겨우 그 명맥을 이어가는 편이었다. 이와 달리 통속민요와 신민요는 다시 대중들속에서 널리 불리기 시작한다. 이런 민요들은 북한과 한국 음악문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
북한 음악문화의 영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족의 음악문화는 문화대혁명이 끝나면서 곧바로 북한 음악문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 즉, 한동안의 봉쇄정책이 폐쇄됨에 따라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과의 음악문화면의 교류가 이루어진다. 특히 70년대 말부터 녹음기가 산생되어 사회에 보급되면서 많은 북한의 노래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조선족 음악문화에 끼친 북한 음악문화의 영향은 주로 북한의 주체사상의 지배하에 개작된 민요를 말한다. 이런 개작된 민요는 조선족 민요의 원래모습을 점점 대중들 속에서 멀리하게 되는 현상을 초래하게 한다.
한국 음악문화의 영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족 민요는 1990년대부터 한국 음악문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한ㆍ중 수교 후 통속민요와 신민요는 오락시설인 노래방, 나이트클럽 등에서 많이 유행하게 된다. 한국 음악문화의 영향을 통속민요와 신민요의 두 유형으로 살펴본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통속민요가 다시 조선족사회에 유입된 것은 건국전과 마찬가지로 경기민요가 주류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민요의 재유입시에는 전자음향에 의한 반주 형태를 갖춘 것이 특징적이며 무대공연종목으로 편곡하여 기능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이 주목된다. 따라서 무대공연종목으로 부르는 노래들이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올라 불려 지게 된다. 그러므로 건국 전에 불리던 허다한 민요들은 이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둘째, 신민요도 건국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조선족사회에 나타난다. 이 또한 통속민요와 마찬가지로 우선 전자음향에 의한 반주를 동반한 것이 특징적이며 다음은 무대공연종목으로 편곡하여 부르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신민요는 조선족사회의 거리와 시장 할 것 없이 모든 공공장소에서 들을 수 있다. 또한 오락시설인 노래방과 나이트 등에서도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사회문화의 급작스런 변화에 따른 노래방, 나이트클럽 등 오락시설이 생성됨에 따라 신민요는 널리 유행되기 시작한다. 한편 조선족 작곡가들에 의한 신민요 또는 가요는 대중들로부터 멀리하게 되는 현상을 초래한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족 민요의 전승과 변용의 과정을 민요의 음조직분석을 중심으로 살펴보기 위하여 먼저 조선족의 민요를 이주사와 연관시켜 조명하였다. 따라서 조선족 민요에는 이주민에 의해 한반도의 향토민요를 중심으로 메나리토리, 경토리(진경, 반경), 수심가토리, 육자백이토리 등이 골고루 나타남을 확인함과 아울러 그 중 메나리토리가 가장 많이 전승되었음을 밝혔다. 그 원인은 연변 진역에는 함경도의 이주민이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며 또한 함경도 민요 자체에는 메나리토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 메나리토리는 주로 연변의 용정을 중심으로 하는 연길, 도문, 화룡, 훈춘 등 두만강 연안 지역에 많다는 것을 밝혔다. 반면에 연변의 안도, 왕청, 돈화 등 지역에는 용정을 거쳐 이주한 함경도 사람과 다른 이주경로를 거쳐 정착한 강원도, 경상도 사람들이 한데 뒤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용적 지역처럼 집중되어 있지 않기에 민요의 토리는 큰 차이를 나타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조선족의 민요를 이주와 연관시켜 논의한 연구는 본 논문이 최초로 된다고 본다. 또한 조선족의 민요를 중국에서의 기존 연구 방법과는 달리 한국의 연구 방법에 따라 민요를 토리별로 규명한 것은 본 논문이 최초로 된다. 따라서 본 논문은 중국 내에서 지금까지 한민족의 민요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조선족 민요의 특징을 나타내는 음조직에 따른 토리를 언급하지 않고 중국의 5음음계 체계에 귀속시키는 잘못된 경향을 바로 잡는데 의의가 있다고 본다. 더불어 한민족의 민요 전반을 연구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은 본 연구에서의 결과는 『집성』 자료집에 의한 것이므로 제한점이 없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집성』에 수록된 악곡으로만 연변 각 지역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은 어느 정도 편차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음원에 대한 확인 작업이 이루어 지지 않은 것도 민요의 토리를 밝히는 데에 오차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조선족 민요에 나타난 토리의 변화형에 대한 원인은 이주민의 유동성에서도 찾을 수 있겠지만 중국 본토의 한족 및 기타 소수민족들과의 접변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셋째, 조선족 민요의 역사와 변화를 중국의 사회적인 변동과 한국, 북한의 영향에서 살펴보았지만 구체적인 사료를 제시하지 못한 것이 본 논문의 한계점이라고 본다.
앞으로 조선족 민요에 대한 광범위한 발굴 정리 사업을 통해 조선족의 민요 전반에 대한 악보와 음향자료가 시급히 정리되기를 기대하면서 본 연구에서 다루지 못한 조선족의 민요와 한족 및 기타 소수민족 민요와의 상호영향에 대한 연구 등 여러 면에서의 여러 가지 방법론에 의한 연구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The Korean-Chinese, one of the ethnic minorities in China, mainly have lived in Yanbian area of China. Unlike other minorities, they are the people who have migrated from Korea to China, so that their musical culture can be regarded as a branch of Korean culture.
The heritage and its transfiguration of the Korean-Chinese folk songs have been examined in this paper, especially based on the analysis of their scales and modes.
Chapter Ⅱ is about the forming process of the Korean-Chinese society and the classification of the Korean-Chinese folk songs. It was argued that the early stage of their migrating time was the period from the 1860's to the 1910's, and the later migration period was from the 1910's to 1945 when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was established. As the Korean-Chinese domiciled themselves in the area of Chinese territory, the folk songs of Korean peninsula also settled down among them.
The Korean-Chinese folk songs can be classified into three groups ; aboriginal folk songs, popular folk songs, and newly-composed folk songs. Aboriginal folk songs include work songs, ritual songs, and amusement songs. Popular folk songs appeared from the ruling period of Japanese imperialism after 1910, with the Japanese electric phonograph companies' inroad into Korea. Newly-composed folk songs came into being from the 1930's, which were relatively few. The music styles of these three categories include menari-tori(music style of eastern area), gyeong-tori(music style of Seoul and its environs), yukjabaegi-tori(music style of south-western area), and sushimga-tori(music style of north-western area), among which menari-tori and gyeong-tori occupy a large majority.
The characteristics of the Korean-Chinese folk songs were examined in chapter Ⅲ through the analysis of scales and modes. First, there are four music styles in the Korean-Chinese folk songs ; menari-tori, gyeong-tori, yukjabaegi-tori, and sushimga-tori. The aboriginal folk songs have more menari-tori than gyeong-tori, yukjabaegi-tori, or sushimga-tori. Second, in many cases, menari-tori is used in work songs among aboriginal folk songs and arirang-related songs among popular folk songs, when gyeong-tori is found in taryeong-related songs in popular folk songs. Third, menari-tori songs are found evenly in various districts including the basin of the Duman river, when gyeong-tori songs are mainly found in Rongjing and Yanji where are the central areas of the Korean-Chinese culture.
Chapter Ⅳ is related to the history and transfiguration of the Korean-Chinese folk songs. They have three stages ; moving-in period, inheriting and stagnancy period, and transfiguration period.
First, at the moving-in period, most of aboriginal folk songs began to be sung especially in Rongjing area. Relatively more menari-tori songs spreaded to Rongjing than other area such as Antu, Wangqing, Dunhwa, because many of the emigrant in that time were from Hamgyeong province. Popular and newly-composed folk songs were rather related to the spread of phonograph or vagabond theatrical troupes than emigration, so that most of these songs had the characteristics of gyeong-tori.
Second, the inheriting and stagnancy period is from 1950 to 1976, when socialistic realism had great influences on folklore. Many kinds of folk songs became the subject of critique, as a result, most of ritual songs firstly disappeared. The number of work-related songs was diminished from the mid 1970's as the diffusion of mechanized farming in rural area. Amusement songs also decreased in number as the change of life-style and social environment.
Third, the transfiguration period is connected with Chinese reform and open-door policy. This policy brought about the cultural influence both from North Korea and South Korea, which could cause the change of music culture. As a result, the aboriginal folk songs could maintain its slender existence by means of professional music organizations. On the other hand, popular and newly-composed folk songs which were effected by music culture of North and South Korea were widely sung among people. North Korean influence started after the Cultural Revolution. According to the end of blockade policy, the cultural interchanges between China and North Korea began. Many songs of North Korea, mainly related the juche ideology, were sung among the Korean-Chinese from this time. Because of the wide-spread of these songs, the aboriginal songs were defamiliarized from them.
South Korean influence started from the establishment of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China and South Korea in 1990's. Popular and newly-composed folk songs effected by South Korean culture widely began to be sung from this time. In popular folk songs transmitted from South Korea to China at that time, those of Gyeong'gi province formed a main stream. They were arranged for stage performance, having an accompany of electric sound that most people could like. This situation was the same in newly-composed folk songs.
This paper must be the first researches that relates the Korean-Chinese folk songs to the migration of Korean people, using the major research stream of South Korean music. The existing studies could not grab the folk songs of the Korean because most researchers would apply Chinese pentatonic scale system to the Korean-Chinese music. It can be argued that this paper can correct this existing erroneous cus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