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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史學硏究 第83號
발행연도
2006.9
수록면
239 - 268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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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한국전쟁 전후 충북지역의 인구변동 추이를 알아본 뒤, 그 원인 중 하나인 인명 피해와 양민학살문제를 해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한국전쟁 이후 인구증가율은 전쟁 이전보다 크게 감소하였는데,그 이유는 전쟁과 그 후유증이 컸기 때문이다. 이것은 충북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인구증가율이 전국 평균치보다 낮았다. 1952~1955년 인구증가율은 전국 평균치 4.8%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0.1%였다. 이것은 충청북도가 다른 지역보다 전쟁에 따른 민간인 피해가 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남한은 예방 차원에서 좌익세력을 처형하였다. 그들은 주로 형무소에 수감 중인 좌익인사와 보도연맹원들이다. 전쟁 직후 충북에서 처형된 보도연맹원은 최소 3천명 이상, 형무소 재소자는 4백명이었다. 뒤이어 밀어닥친 북한군은 우익인사들을 처형하였다. 1952년 3월까지 북한군에 의해 충북지역에서 피살된 사람은 총 6,168명이었다. 그뒤 북한군이 밀려가자, 이번에는 북한 점령하에서 활동하던 좌익인사들이 처형되거나 고향을 떠나갔다. 그 결과 전쟁 이전 활동하던 충북지역 좌익인사들은 거의 모두 죽음을 맞이하거나 지역 밖으로 밀려났다.
이와 같이 전쟁에 따른 이념의 칼날은 수많은 민간인을 죽음에 몰아넣거나 자의든 타의든 고향을 등지게 하였다. 그래서 한국전쟁기에 충북지역에서 모두 7만명 이상이 사망, 학살, 납치, 행방불명되었다. 그래서 전쟁 이후 충북의 인구 증가율은 거의 정체된 상태였다. 전운이 장기간 지속된 산간지역은 오히려 인구가 감소하였다.
특히 영동군과 단양군의 인구 감소는 이례적이었다. 1952년 영동군의 인구는 1949년 5월 인구보다 7,010명(6.5%)이 줄어들었다. 단양은 6,792명(10.9%)이 감소하였다. 이들 두 지역은 1959년까지도 1949년의 인구수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그 원인은 전적으로 전쟁에 따른 인명 피해에 있었다.
충청북도에서 영동군과 단양군은 각각 남쪽과 북쪽 끝에 있는 지역으로, 두 지역 모두 북한 인민유격대와 빨치산 활동이 왕성했던 곳이다. 또한 두 지역 모두 북한군과 남한군ㆍ미군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공방전으로 전쟁의 피해가 참혹했고 미군의 폭격으로 수많은 양민이 죽어갔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두 지역의 전쟁 참화와 양민학살사건의 심각성은 1950년대 영동군과 단양군의 인구변동이 객관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목차

요약
Ⅰ. 머리말
Ⅱ. 한국전쟁 전후 충북지역 인구 추이
Ⅲ. 전쟁에 따른 충북지역의 인명 피해와 양민학살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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