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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발해학회 고구려발해연구 高句麗渤海硏究 第32輯
발행연도
2008.11
수록면
145 - 164 (2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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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契丹太祖가 渤海를 거란의 대대로의 원수라고 한 것이 두 나라간의 관계에서 어떤 연원이 있는지를 발해와 거란의 관계를 통하여 검토하였다.
발해와 거란은 이웃하고 있었고, 풍속도 서로 같다고 하였다. 『舊唐書』와『新唐書』발해전에서는 발해의 풍속이 高麗만 아니라 거란과 같다고 하였다. 결국, 발해와 거란, 고려, 말갈, 돌궐은 습속상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발해 건국집단이 거란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營州로부터 탈출이 바로 거란의 난으로 인한 것이었고 또 東走과정에서도 거란과 일정한 협력이 있었고, 乞乞仲象의 칭호인‘舍利’는 바로 거란군사를 관할하는 頭目의 칭호였다. 당 則天이 대조영 무리를 끈질기게 토벌하게 되는 원인이 바로 이들이 李盡忠의‘餘黨’이기 때문이었고, 崔致遠의 글에서도 발해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발해와 거란이 공모하였다는 것을 신라인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해와 거란의 협력은 발해 건국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720년 9월 奚와 거란을 토벌하라는 唐의 요구에 발해가 응하지 않았고, 심지어 732년 발해가 당나라의 登州를 공격한 배경에 거란의 지원이 있었다.
9세기에 발해와 거란의 관계에 대해서는『신당서』발해전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는데, 夫餘府는 원래 夫餘의 옛 지역이었고, 이곳에 항상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 거란을 방어하였으며, 扶州와 仙州를 관할하였다고 하였다. 발해의 5경 15부 중에서 부여부 이외에 군사를 주둔시켜 방비하는 곳이 한 곳도 없다는 점에서 부여부는 발해에서 가장 군사적으로 민감한 지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때에는 발해와 거란이 대립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耶律阿保機가 거란족의 유력한 지도자로 등장하는 시기인 10세기부터는 거란이 발해에 대하여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하게 된다. 925년 12월 야율아보기는“이른바 두 가지 일 가운데서 한가지 일은 이미 완수하였으나, 발해와의 대대로 내려온 원수는 갚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편안히 있을 수 있겠는가.”라 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926년 1월 발해를 멸망시켰다. 이 시기 발해와 거란간의 관계에 대하여, 고려 太祖는 발해와 거란은 아보기의 등장 이전까지는 서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아보기 등장후 거란이 無道하게 발해를 멸망시켰다고 보았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발해는 건국 이전부터 거란과 친밀하였고, 이러한 관계가 8세기 전반까지 유지되고, 9세기에 일시 긴장관계도 있었지만, 거란 태조인 야율아보기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양국이 대대로의 원수사이는 아니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발해 건국 전후의 관계
Ⅲ. 8 - 9세기 양국의 관계
Ⅳ. 멸망 전후의 관계
Ⅴ. 맺는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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