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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문종 (전북대학교)
저널정보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 인문과학연구 제21집
발행연도
2009.6
수록면
223 - 243 (2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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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6세기는 士林들이 중앙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東西分黨이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상품유통이 활발해지면서 地方場市가 발달하고 대외무역도 활발하게 행하여졌다. 그러나 농장의 확대로 농민층이 몰락하고 貢納ㆍ軍役制의 폐단으로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게다가 삼포왜란 이후 왜구의 침입이 급증하면서 조선의 사회는 인심이 흉흉하고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졌다. 또한 군역제의 동요가 나타나면서 국방체제의 근간인 鎭管體制도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국왕사를 사칭한 위사는 일본의 혼란한 국내사정과 조선정부의 일본에 대한 정보부족 그리고 일본국왕사에 대한 우대 등을 배경으로 1470년부터 나타났으며, 삼포왜란을 전후하여 변질되었다. 삼포왜란 이전의 위사는 막부장군의 측근이나 일본본토의 호족들이 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삼포왜란 이후에는 대마도주가 조선과의 통교에 많은 제약을 받게 됨에 따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위사를 파견하였다. 그 결과 국왕사를 사칭한 僞使가 급증하였다.
三浦倭亂 이후 조선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備邊司를 설치하고 군사제도를 制勝方略 體制로 개편하는 한편 板屋船을 건조하는 등의 노력을 강구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직전에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무능한 守令을 교체하고 경상ㆍ전라도의 성곽을 수축하기도 하였으나 형식적인 면에 그쳤고, 이는 오히려 백성들의 원망만 샀다.
임진왜란 초기 일본의 침입에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하고 官軍이 일본군에게 패배한 요인은, 정치ㆍ사회ㆍ경제적인 변화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국가기강의 해이, 일본의 국내정세에 대한 정보의 부족, 조선군의 전술과 무기가 일본군에 비해 부족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의병의 활동과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수군의 승리 그리고 새로운 무기와 전술의 개발 등을 통해서 초전의 패배를 극복하고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임진왜란 직전의 국내정세
3. 日本國王使의 변질과 僞使
4.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비책
5. 임진왜란 초기의 패배원인 - 맺음말을 대신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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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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