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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혜원 (연세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3호
발행연도
2010.9
수록면
215 - 251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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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기독교 선교 역사상 최악의 재난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는 의화단 운동은 서양의 종교와 나아가 ‘서양’ 자체를 배척하고자 했던 종교 운동이었다. 의화단 운동으로 4만 명이 넘는 가톨릭 및 개신교인과 선교사들이 사망하였는데, 기존의 연구에서는 의화단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중국 북서 및 북동 지역의 선교지 폐쇄에만 초점을 맞춰 연구가 되었다. 하지만 북부 뿐 아니라 광동 및 중부 지역에서도 의화단을 피해 선교사들은 선교지를 잠정적으로 폐쇄하였고, 많은 선교사들이 상하이 조계지나 일본으로 피난하였다.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생각하여 의화단 운동이 발생한 것에 대해, 당시 중국 선교사들은 그 책임이 본국의 힘을 빌려 선교 사업에 사용하였던 자신들에게 일부 있음을 인정하고, 1900년 9월에 뉴욕에서 초교파 선교사 대회를 개최하여 향후의 선교 방법과 선교 정책에 대해 새롭게 논의하였는데, 이때 초교파적 선교 사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한국의 경우도 의화단 운동의 영향을 받았는데, 사회적으로는 수천의 중국인 들이 한국으로 피난을 오고, 전쟁 소문의 여파로 물가 폭등과 사재기가 발생하는 등 불안감이 조성되었고, 정부도 군대를 보강하면서 의화단 전쟁에 대처하려 하였다. 종교적으로는 동학이 의화단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들과 서양인들을 공격하였는데, 특히 의화단이 들어와 활동하던 중국 단동과 국경을 마주한 의주지역 및 평안도 지역에서 그 피해가 심하였다. 의화단과 직접 인맥이 닿은 동학의 영수가 기독교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을 일소하고자 하는 시도가 평양 근처에서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밖에도 산동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및 신도들이 한국으로 피난을 와 한국 교회의 보호를 받았으며, 미국에서 산동으로 새로 임명받은 선교사들이 임지를 바꿔 한국으로 부임하여 들어오기도 하는 등, 1900년 한국 선교지도 의화단 운동의 여파로 크고 작은 소요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1900년 겨울, 이용익과 김영준이 일시에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을 살해하고자 황제의 거짓 밀서를 내린 일명 ‘도륙비지사건’의 경우, 기존 연구와 달리 이용익과 김영준이 실제로 벌인 일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당시 이 사건을 조사한 조선 정부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관 주임 신조우 준은 보고서에서 거짓 밀서는 이용익과 김영준이 내린 것이 아니라 모함을 받은 것 같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대신 당시 본 사건에 대해 보고한 선교사들은 의화단의 영향을 받은 동학도들이 거짓 밀서를 퍼트린 것 같다고 보았다. 즉, 개인적 반미감정이 있는 2명의 조정 대신이 일으킨 사건이 아니라 의화단의 영향을 받은 동학에 의해 ‘비지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목차

1. 머리말
2. 중국 기독교 선교 현장과 의화단 운동
3. 한국 개신교 선교현장과 의화단 운동
4.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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