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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승 (한국해양대학교)
저널정보
역사문화학회 지방사와 지방문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4권 제1호
발행연도
2011.5
수록면
203 - 261 (59page)
DOI
10.17068/lhc.2011.05.14.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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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온천은 신라시대부터 명성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종친을 비롯해 부산의 왜관거주 일본인들 또한 온천을 이용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따라서 부산항의 개항과 함께 일본인들은 일찍부터 동래온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개발에 앞장섰다. 이 때문에 동래온천은 1920년대 이미 한국 최대의 온천으로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는 대륙의 관문으로서 부산이 갖는 지리적 조건과 많은 일본인들이 부산항에 거주한 탓에 경편철도를 시작으로 전차와 같은 대중교통 수단이 발전했던 것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었다. 동래온천은 1930년에 이미 연간 온천이용객이 16만 명이었으며 그 중에서 한국인들이 주로 이용한 동래면영(東萊面營) 공중욕탕의 연간 입욕객수는 10만 명을 헤아렸다. 이 수치는 당시 부산부민(釜山府民)의 인구가 13만 명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동래온천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래온천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부산부(釜山府)와 동래온천 사이를 운행한 전차노선이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동래읍을 경유한 노선상의 특성을 빼놓을 수 없다. 동래온천이 갖는 이러한 입지적 조건 때문에 ‘관광’객으로서 동래온천을 찾는 외지인들 뿐만 아니라 일상의 많은 한국인들 역시 동래온천을 이용하였음을 뜻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 또한 직접 목욕탕에 들어가는 입탕(入湯)문화를 경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동래온천의 개발은 동래기생의 존속을 가능케 했으며 그것은 지금까지 전승되는 동래학춤과 같은 전통문화의 계승을 가능케 한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목차

[초록]
1. 머리말
2. 동래와 해운대의 온천개발과 교통편의 발달
3. 동래와 해운대의 온천시설과 각종 연예
4. 동래온천의 시설확장과 온천의 배탕(配湯)을 둘러싼 지역사회의 동향
5.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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