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영범 (대구대학교)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4집
발행연도
2009.12
수록면
321 - 359 (39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글은 총체적 육사연구의 진전에 기여코자 하는 의도로 작성되었다. 그런 뜻에서 李陸史의 독립운동에 관해 金喜坤敎授가 주도해 온 근래의 연구결과와 그로부터 인출된 통설 중에서 몇 가지 모호한 부분을 분석적으로 재검토하여 보다 합당한 이해를 도모코자 하였다. 그 작업은 陸史의 ‘독립운동 시-공간’의 사실적 재구성과 직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 종류의 자료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재해석을 통하여 진행된 논의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陸史는 1926년 7월에 北京으로 가서 가을에 中國大學 商科에 입학하여 1927년 6월까지 2개 학기를 다니다(수학기간 7개월) 그만두고 8월경 귀국했음이 거의 확실시된다.
둘째, 陸史가 1926년 하반기부터 1년간 廣州의 中山大學을 다녔으며 독립운동단체의 간부이기도 했다는 종래의 주장과 통설화는 전면 재검토되어야 한다. 당시 廣州의 義烈團 및 留韓國革命同志會 간부였던 徐應鎬의 상세한 진술 내용에 비추어 보더라도, 中山大學 재학생 명부와 일제 관헌자료에 등장하는 ‘李活’ 관련 기록 내용의 정확성과 신뢰도를 의 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1930년대의 陸史의 필명을 1920년대로 소급적용하여 무조건 同一人視하는 데도 여러 무리가 따른다. 가용한 자료의 종합적 검토 결과, 현재로서는 陸史의 ‘광주시절’은 不在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셋째, 1934년 ‘남경군관학교사건’의 한 피의자였던 陸史의 신문조서 자료는 진술의 이면과 행간의 의미까지 감안하여 조심스럽게 해석되어야 한다. 被囚를 면하고 국내 활동공간을 확보키 위한 위장ㆍ기만 진술이 상당 부분 있었음이 간취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자료를 음미하고 재해석해 보면, 육사는 尹世와의 사전 연락이나 밀의에 의해 의열단의 독립운동 지원ㆍ가담을 목적으로 1932년 봄, 北京을 향해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의열단 본부가 南京으로 옮겨갔음을 뒤늦게 알게 된 그는 다시 南京으로 뒤따라가 의열단의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자진 입학하였다.
넷째,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재학 중이던 6개월여의 시간은 그대로 陸史의 ‘남경시절’이 되었다. 그 기간에 그는 혁명운동에의 본격적 투신을 위한 사상적 입지를 다지고 이론적 무장을 기하였다. 그 연장선에서 陸史는 의열단의 혁명운동노선을 수용하고 실질적 의열단원이 되었으며, 1933년에 ‘의열단 국내 공작원’으로서 밀파되었던 것이다.

목차

1. 문제 제기와 그 맥락
2. 1920년대 ‘북경시절’의 내용과 의미
3. 陸史의 ‘광주시절’의 실재 여부
4. 陸史의 ‘남경시절’과 의열단
5.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3-911-000496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