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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장순순 (전북대학교)
저널정보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 인문과학연구 제31집
발행연도
2011.12
수록면
197 - 226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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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부산포 왜관은 280 여 년 동안 세 번이나 장소를 옮기는데 그것이 바로 절영도왜관, 두모포왜관, 초량왜관이다. 본 연구는 세 차례에 있었던 왜관의 이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조선정부가 구상한 왜관은 어떤 모습이었고, 구상의 실현을 위해 어떠한 조치를 단행했는가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조선전기 왜관이 조선전기 대일정책의 근간은 왜구의 재발 방지와 증가하는 통교자를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측의 반대 속에서 조선정부가 주도한 것이라면, 조선후기의 왜관은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조선후기 왜관은 절영도→두모포→초량으로 이어지는 부산 단일왜관이었다. 왜란 직후 일본에서 파견된 강화교섭사자들에 대하여 당시의 국내정서상, 대의명분상 상륙을 허가할 수 없었던 상황 속에서 절영도왜관은 성립되었다. 두모포왜관 시기에는 왜관운영을 위한 각종 제도가 생겨나고 왜관시설이 갖춰졌으며, 초량왜관의 성립으로 조선전기부터의 일관된 왜관 정책인 ‘왜관통제’ 및 왜관 시스템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선후기 왜관의 설치, 운영 및 이전은 조선이 처한 국내외적인 상황과 연동한 것이었다.
조선전기와 달리 후기에는 부산에만 왜관이 설치되면서 외교의례 및 접대는 서울, 무역은 서울과 포소왜관이라는 도식이 무너졌다. 부산포왜관은 양국의 외교교섭이 수시로 진행되는 공간이었고, 안정적인 무역장소를 제공하였다. 조선정부에게 있어서 왜관은 외교의 공간이라면 일본에게 있어서는 무역의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왜관이 일본에는 없이 조선 영토 안에서만 일방적으로 위치하였고, 그 명칭이 쓰시마관이나 일본관이 아닌 부산관, 동래관이었다는 것은 왜관이 외교적인 성격을 가진 통제의 공간임을 시사한 것이다.
어떻든 임진왜란 이후 두모포왜관이 조선정부의 대일 유화책에서 성립한 것이라면, 초량왜관은 현종말 숙종대의 대일외교의 자신감 속에서 성립한 것이고, 그 결과 조선정부는 왜관 경영과 통제에 보다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인들의 경제적 요구를 들어주면서도 다른 지역으로의 자유로운 왕래를 제한하여 적절히 통제하는 방편으로 왜관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무역이나 교류의 공간보다는 도항해오는 일본인들을 적절히 잘 통제할 수 있는 공간 바로 조선 정부에서 왜관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절영도왜관의 성립
3. 두모포왜관의 성립과 왜관 정책
4. 초량왜관 이건과 왜관 정책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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