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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동철 (부산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37집
발행연도
2010.12
수록면
3 - 36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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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세기에 왜관은 동래에만 존재하였다. 왜관은 일본과 조선, 일본과 동래, 대마도와 동래의 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장소였다. 신왜관이 건설된 지 1년 후인 1679년에는 일본인이 출입하는 범위를 정하였다. 북쪽의 사카노시타를 지나 구왜관으로 이어지는 노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開市貿易의 장소는 開市大廳이다. 개시대청은 조선상인이 왜관에 들어가 교역하는 가장 합법적인 장소였다. 그러나 그곳은 조선인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그곳은 무역주체나 무역품에서 엄격한 히에라르키가 존재하는 장소였다. 히에라르키는 왜관 안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관의 안과 밖에 각각 開市와 朝市라는 위계적인 장소가 존재하고 있었다.
조시는 일본인에게 魚物,과일, 야채, 쌀 등 생필품을 조달하기 위해 왜관 정문 밖에 설치된 새벽 시장이다. 이곳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가장 직접적으로 만나는 교류의 장소이다. 그곳도 어디까지나 통제 속에서 허용된 열린 장소였다. 조시의 주체는 주변 지역민이며, 특히 草梁村民이 그 중심이었다.
왜관의 일본인은 초량촌을 자주 출입하였다. 초량촌은 일본인과 조선인이 만나고, 교류하는 삶의 터전이었다. 왜관의 일본인 남성과 초량촌의 조선인 여성 사이에는 단골 관계를 형성할 정도로 친분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정부 당국자의 입장에서는 왜관은 늘 통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왜관 주변 지역민에게는 왜관은 삶의 터전인 교류의 장소였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왜관 공간의 통제
3. 開市大廳의 장소성
4. 조시의 장소성
5. ‘坂ノ下‘, 草梁村, 新草梁村의 장소성
6. 왜관의 遺産 : 두 石碑의 表象
7. 맺음말
ABSTRACT

참고문헌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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