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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양흥숙 (부산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49집
발행연도
2014.12
수록면
83 - 125 (43page)
DOI
10.18496/kjhr.2014.12.4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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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경은 여진족을 접하는 두만강 일대, 중국과의 경계인 압록강 일대, 일본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동래부 등을 지칭하였다. 국경 지역 중에 동래부의 가장 큰 특징은 일본인 거주지가 관할 구역 내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왜관이라고 불리는 일본인 거주지가 1407년 조성되기 시작한 이래 1876년 근대 개항까지 존속되었다. 더욱이 왜관은 조선 남해안의 세 포구에 각각 있다가 1544년 사량진왜변을 계기로 부산포 한 곳에만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부산 단일 왜관 형성을 임진왜란 이후의 시기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16세기에 잦은 왜변으로 부산포왜관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으리라는 가정이었다. 그러나 왜관의 역할은 계속되고, 왜관주변의 조선인 역시 일본인과의 교류를 지속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교류의 양태는 임진왜란 직후, 양국 國交가 공식적으로 재개되기 전에 開市가 승인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제포왜관을 열어달라는 일본 측의 지속적인 요구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부산포에만 왜관을 둠으로써 동래 사람들은 일본인과의 교류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특히 그 물자를 교환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市場을 통해 동래 사람들과 왜관의 일본인들은 일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1544년 蛇梁鎭倭變후의 동래와 부산포
3. 임진왜란 후 무역 재개와 단일 왜관
4. 교류의 장, ‘開市’ 속의 동래 사람들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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