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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형목 (독립기념관)
저널정보
호서사학회 역사와 담론 역사와 담론 第68輯
발행연도
2013.10
수록면
1 - 38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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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충북지역 국권수호운동은 크게 의병전쟁 ? 문화계몽운동 ? 국채보상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곳은 의병전쟁 책원지이자 진원지였다. 중심세력은 유중교 · 유인석을 중심으로 하는 화서학파였다. 초기에는 전술과 전략에 거의 문외한이 문인들이 의병진 지도부를 차지하였다. 해산군인의 의병진 합류는 전면적인 의병전쟁으로 승화되는 계기였다. 일제강점기 만주나 연해주 지역 독립전쟁은 이러한 의병정신을 계승한 역사적인 산물이었다. 승패에 구애됨 없이 혈전을 전개한 의병정신은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는데 있었다.
국망에 대한 위기의식은 교육 ? 계몽운동을 추동시켰다. 견고한 전통은 근대교육과 외래 사조 수용에 소극적이었다. 기호흥학회를 제외한 정치?계몽단체 지회가 전무한 사실은 이를 반증한다. 근대교육운동 특징은 여성교육 부진, 일본어 보급 확산, 민중에 의한 교육기관 설립 부족 등이었다. 이는 여러 측면에서 파악해야할 문제이나 의병전쟁 중심지인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국채보상운동은 장날에 즈음한 연설회 개최와 선전?홍보 등으로 경쟁적인 참여를 유도할 수 있었다. 영동 ? 진천 ? 보은 ? 청주 ? 옥천 등지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상인층과 군인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청주진위대 병사들은 스스로 국채보상회를 조직하는 한편 솔선수범하였다. 특히 진천군 광혜원 부인들 활동은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열화 같은 참여와 달리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8월 이후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광무황제 퇴위와 군대해산, 선전활동에 대한 가혹한 탄압, 운영 방향을 둘러싼 갈등 등은 주요 요인이었다. 충북관찰사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한 수수방관적인 태도는 당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충북인은 다양한 경험과 참여를 통하여 새로운 사회질서를 모색하였다. 시세변화에 부응하는 한편 민족사적 과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에도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민족의식 고취, 현실인식 심화와 자아각성 등은 사회적인 책무를 절감하는 생활현장이었다. 이는 국권회복운동을 진전시키는 원천이나 마찬가지였다.

목차

국문 초록
1. 들어가는 말
2. 민족의식을 일깨운 의병전쟁
3. 현실인식을 심화시킨 교육 계몽운동
4. 대동단결을 도모한 국채보상운동
5. 나오는 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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