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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오영찬 (이화여자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76
발행연도
2014.12
수록면
95 - 125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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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위만조선의 재인식과 위만조선 고고학의 성립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위만조선 고고자료의 공백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위만조선은 조선 후기 正統論的 역사 체계 하에서는 왕위를 찬탈한 僭國이자 簒賊의 존재였다. 하지만 개화기에 들어 근대 국민국가와 연계된 민족이라는 실체가 서서히 자각되면서 위만조선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林泰輔의 『朝鮮史』에서 비롯된 식민사학의 세례 이후, 1907년 白鳥庫吉은 위만조선을 식민지로 파악하였는데, 당시 무차별적으로 도입된 ‘식민지’ 개념은 이후 식민사학의 근간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위만조선 고고학은 그 자체 내지 고조선 문화의 견지에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 낙랑군 사회의 토대이자 출발점으로 이해된 것이었다. 당시 非漢式 문화인 세형동검문화를 漢系 문화로 해석하면서 위만조선의 고고학 문화로 오인하였는데, 이러한 인식은 이원적 종족구조론의 주된 근거가 되었다.
이원적 종족지배 구조를 갖춘 위만조선에 부합하는 고고학적 실체를 찾으려는 시도가 자칫 위만조선의 고고학적 공백에 일조를 하는 측면이 있었다. 이보다는 위만조선의 전반적인 고고학적 양상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대동강 이북과 이남 지역에 걸쳐 위만조선 유적이 분포하였다는 점, 화분형토기를 통해 위만조선과 낙랑군 간 토기문화의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점, 금동개궁모가 위만조선 시기에 이미 위신재로 수입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위만조선의 재인식
Ⅲ. 위만조선 고고학의 성립
Ⅳ. 위만조선 분묘자료의 탐색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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