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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발해학회 고구려발해연구 高句麗渤海硏究 第52輯
발행연도
2015.7
수록면
173 - 208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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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왕 시기 고구려는 압록강 하구의 西安平을 영유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수도 국내성 방어체계 확립과 해양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이곳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것을 위해서는 수군 발전이 절실하였다. 한편 공손연과의 북방외교에 실패한 손오는 요동에서 도망친 자국 사신의 고구려 逃亡을 계기로 고구려와 외교를 개시한다. 이 부분에서 동천왕의 對중국 외교 발단은 필연적 요소와 우연적 요소가 결합된 양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고구려는 손오의 우수한 수군력 습득을 위해서 접촉하였으며 손오는 말을 수입하기 위해 고구려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교류는 234년 손오가 조위에게 패배하면서 균열이 발생하였다. 조위의 수군이 활약하여 孫吳軍을 막았다는 사실은 고구려로 하여금 새로운 고민을 던져주게 하였다. 즉 손오와의 외교를 재개할 근본적 명분이 사라진 셈이었다. 결국 236년 고구려-손오의 외교는 파국을 맞이하였으며 고구려-조위의 외교가 전개되었다. 남방의 안정을 찾은 조위는 238년 동북방의 공손연 정벌을 계획하였으며 고구려도 군대를 파병하였다. 두 국가는 원활한 정벌을 수행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막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결국 공손연 멸망 이후 고구려-조위의 대결 구도로 이어졌다. 조위는 238년 낙랑·대방을 점거하였고 이때와 가까운 시점에 고구려의 서안평도 함락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전격적으로 이루어지던 조위의 압박이 요동남부 주민의 연이은 이주로 잠시 주춤해지자 동천왕은 242년 서안평을 공격하였다. 이 공격은 서안평을 기점으로 한 수군 양성이라는 초기 기조를 재확립하기 위함인 동시에 손오와의 외교 재개를 시도하기 위한 복안이었다. 이처럼 고구려와 조위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었으며 조위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공이라는 결과로 번지게 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배경: 서안평 활용과 중국의 동향
Ⅲ. 고구려-손오의 접촉과 외교 전개
Ⅳ. 조위로의 노선 전환과 외교 종결
Ⅴ. 맺음말
〈참고문헌〉
〈日文抄錄〉

참고문헌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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