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은석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37호
발행연도
2016.8
수록면
67 - 95 (29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신라는 도성인 경주에서 천년간 수도를 유지하면서 한정된 구역내 지속적인 도시발전으로 유적이 중첩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김유신의 종택으로 알려진 재매정을 발굴했지만 7세기대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어떠한 구조인지도 파악할 수 없었다. 다른 경주 중심지역에서도 7세기대 석축적심구조의 주거용 초석건물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면 주거 건축물은 어떤 구조인가?
경주 월성 북서편 해자지역에서 확인된 굴립주건물지를 비롯, 전국에서 확인되는 6~7세기대 신라 주거 · 생활 관련 유적을 검토한 결과, 7세기대 주거건축의 특징은 초석건물이 아닌, 굴립주 혹은 수혈주거지의 축조 방식이 계속 유지되었음을 밝혀주는 유적들이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경주에서도 주거건물은 초석건물지가 아닌, 굴립주건물지였음이 확실해졌다.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도 수혈주거지나 굴립주건물지는 계속해서 축조・유지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백제 사비도성인 부여지역에서 확인되는 굴립주건물지와 비교한 바, 기후와 기반토층에 따른 건축 구조의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6세기 중후반 이후 황룡사를 중심으로 신도시 구획(坊)이 설정되고, 초석건물지에 가구식기단을 갖춘 사찰과 대형건축물이 축조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축조 방식이 신라 주거 건축에 적용되는 시기는 적어도 통일신라시대 단계 이후인 8~9세기대에 성행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5~7세기대 신라 주거유적
Ⅲ. 백제유적과 비교 및 고찰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6)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7-911-001130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