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혜영 (강릉원주대)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24호
발행연도
2016.12
수록면
173 - 219 (47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논문은 정부수립 후 한민당(1949년 2월 10일 민국당으로 개편)의 집권 전략을 헌법 갈등과 연관시켜 분석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승만과 함께 단독정부 수립을 주도한 한민당은 처음에는 내각책임제 헌법을 채택함으로써, 그리고 이것이 실패한 뒤에는 각료직의 다수를 확보함으로써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초당파주의’를 내세우며 내각에서 이들을 배제했고 한민당의 집권 구상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한민당은 ‘내각 개조’를 공식 방침으로 정하고 이범석, 윤치영, 임영신 등 내각의 핵심 인물을 상대로 공세를 펼쳤다. 이 과정에서 한민당은 의회의 정부 비판 분위기를 활용했는데, 특히 내각책임제 개헌론은 내각 개조를 압박하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결국 이승만은 한민–민국당 인사들로 내각을 교체했고, 1949년 6월이 되면 이들 계열이 내각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민국당이 ‘여당’이 된 것은 아니다. 새롭게 내각에 등용된 인물들은 민국당 안의 이승만 직계 그룹, 즉 ‘안국동구락부’에 국한되었고, 또한 의회에는 친이승만 집단인 일민구락부가 조직되어 민국당을 견제했다. 결국 민국당은 1950년 1월 27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내각 침투의 타협적 방식을 포기하고 행정수반으로서 이승만의 권한을 박탈해 사실상 정권을 교체하려 한 것이다.
개헌안이 제출되자 이승만은 의회 안팎의 지지세력을 총동원해 이를 부결시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직선제 ·양원제 개헌 추진을 공식화했다. 그 결과 내각책임제 對직선제 ·양원제의 헌법 갈등 구도가 명확해졌고, 이는 1952년 여름 피난 수도 부산을 정치파동으로 몰아넣은 뒤 끝이 났다.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에 성공함으로써 1인 집권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반면 민국당은 야당으로서 그 위치가 고정되었다. 또한 권력 연합의 공간이 사라지는 대신 선거를 통한 권력 교체만이 집권의 수단으로 남게 되었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5·10선거 후 한민당의 집권 구상과 정권 배제
Ⅱ. 한민 – 민국당의 여당화 전략과 이승만의 대응
Ⅲ. 민국당의 내각책임제 개헌 기도와 헌법 갈등의 본격화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56)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7-911-002059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