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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경숙 (명지대학교)
저널정보
명지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 미술사와 문화유산 미술사와 문화유산 제5집 특별호
발행연도
2016.11
수록면
183 - 210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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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주관한 태조의 어진 제작에 화사(畵師)로 참여한 채용신은 20세기 초 초상화가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그는 초상화 이외의 산수, 화조 등 여러 화목(畵目)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실제로 그의 작품 목록은 초상화 뿐 아니라 화조화·산수화 등 매우 다양한 화목으로 구성된다.
채용신은 정산군수를 마지막으로 관직을 떠나 직업화가로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상황에서 채용신은 신문물을 수용하기보다는 일제에 저항하는 최익현, 황현, 최재우 등 우국지사들과 뜻을 같이하여 이들의 초상화를 무료로 그려주는 것으로 항일운동에 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본고는 초상화가로 이름난 채용신이 7점의 무이구곡도를 완성환 것에 주목하였다. 채용신은 문집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그와 교유했던 인물들을 찾기는 쉽지 않다. 여러 점의 무이구곡도를 제작하는 데 그의 인맥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거라는 가정 하에 채용신이 초상화를 그린 인물들의 학문적 사상적 배경을 검토하였다. 또한 채용신이 지은 『석강실기』에 글이나 시를 남긴 인물들을 조사한 결과 약 20명시 유생이거나 의병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인물들과의 교유를 통해 채용신은 가장 많은 무이구곡도를 제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채용신의 무이구곡도 중 1915년에 제작된 작품에도 「무이도가」 10수를 거꾸로 써넣었다. 1915년 9월은 일제가 경북궁에 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건물을 훼손한 해이다. 채용신은 이것을 보고 있어야 하는 울분을 무이구곡도에 주자가 유람을 하면 감흥을 시로 표현한 무이도가를 거꾸로 쓰는 방법으로 분출하였다. 즉 1915년 작품은 채용신 자신의 심경을 표현하는 일기장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19세기에 제작된 이원조와 허련의 무이구곡도와 채용신의 작품은 서로 전혀 연관성을 보이지 않았다. 채용신은 당시 중국에서 들여온 동천공의 『무이산지』를 참고하여 화면을 재구성하였다. 또한 1904년 작에서는 무이구곡 총도를 제10폭에 배열하는 변화를 선보였다. 초상화가로만 널리 알려진 채용신은 뛰어난 산수화가이자 나아가 망국의 울분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표현할 줄 알았던 화가로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목차

Ⅰ. 들어가는 글
Ⅱ. 19세기 무이구곡도의 특징
Ⅲ. 채용신의 1915년 作 《무이구곡도》 10폭 병풍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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